인간도살장 베르당을 가다!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0-03-29 13: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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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2016년 봄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이 프랑스의 베르당 전몰자 기념관에서 만나 두 나라와 유럽의 평화를 기원하고 화해를 다짐하였다. 100만 명의 프랑스 독일 군인들이 죽거나 다친, 세계 전쟁 사상 가장 참혹하였던 베르당 전투 100주년을 맞아 이뤄진 행사였다.

 

나는 17 년 전 베르당과 마지노 요새를 방문한 적이 있다. 戰場으로 가기 전에 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샴파뉴 지방의 에프네이市에 있는 모에 샹동 회사를 찾았다가 점심 때 고급 샴페인을 곁들인 식사를 대접 받았다. 한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를 전후하여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도취하여 안보는 실종, 복지는 과잉으로 가는 풍조를 빗댄 이야기였다.

점심 때 내 앞에 앉은 홍보담당 부사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왜 샴페인이 축하주로 쓰이는지 물었다. 사람 좋은 인상의 부사장이 하는 이야기는 전설 같았다. 나폴레옹은 이 회사 주인과 친해 戰場(전장)에 나갈 때 샴페인을 자주 마셨다는 것이다. 1815년 6월18일 워털루 결전이 있기 전 나폴레옹은 이 양조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대신 프러시아, 영국의 장군과 왕족들이 모에 샹동의 샴페인을 마셨다는 것이다.

워털루 결전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영국과 프러시아 군대는 이겼다. 모에 샹동의 사장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샴페인을 마시면 전쟁에서 이긴다, 샴페인엔 행운이 따른다는 소문을 군인들 사이에 퍼뜨렸다. 나폴레옹과 프랑스를 징벌하기 위하여 참전했던 연합군이 돌아갈 때 이 영업사원들은 군인들 대열에 끼여 샴페인 선전을 하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삽시간에 샴페인을 마시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문이 유럽의 王家(왕가)와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는 설명이었다.

샴파뉴 지방의 에퍼네이를 출발하여 로렌 지방으로 들어가 베르당까지 가는 길 주변은 풍요한 들판이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여러 번 영토를 주고받은, 1차 세계 大戰(대전)의 격전지로 가는 길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베르당에 가까워오니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의 간판이 자주 나타났다. 1916년에 프랑스와 독일군이 300일간의 격전에서 100만 명의 젊은이들을 희생물(쌍방 약30만 명 戰死, 약70만 명 부상)로 바친 도시가 「평화의 도시」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 지도부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근년엔 양국 頂上(정상)이 베르당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兩國의 화해를 다짐하기도 했다.

베르당은 인구 2만 명의 작은 마을이다. 로마시대인 서기 3세기부터 게르만족과 접경한 古都(고도)였다. 중세의 성당이 있다. 이 마을 입구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영어 가이드(여성)를 태웠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베르당 전투가 벌어졌던 野山으로 향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지나지 않는 丘陵地(구릉지)였다. 달 표면처럼 움푹움푹 들어간 포탄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포탄자리가 하도 많아 평탄한 곳이 전혀 없는 산비탈이었다. 지금도 숲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한다. 불발탄을 건드려 다치고 죽는 사고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이 좁은 공간에서 6000만 발의 포탄이 터졌다고 한다.

베르당 전투 참전자는 당시 프랑스에서 수십 명만 생존해 있었다. 南佛(남불) 출신 군인들이 많이 참전했다. 드골 장교는 이 전장에서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다. 베르당 지역에는 독일군인들의 공동묘지도 수십 개 있다. 프랑스 군의 납골당은 야산 頂上(정상) 두오몽 요새 근방에 있다.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15000명의 무덤과 無名(무명)전사자 유골 13만 명분이 보존되어 있다. 13만 명의 유골이 어떻게 보존되어 있는가. 길이 137미터의 石造(석조) 건물에는 창이 많이 나 있다. 그 창을 들여다 보았더니 안이 온통 유골더미였다. 해골, 팔 다리 뼈, 가루가 된 것 등등. 이 유골 더미 위에 石棺(석관)이 놓여져 있다. 석관 안에는 유골이 없다고 한다. 높이 46미터의 충혼탑, 교회, 타고 있는 촛불...

세계 戰史(전사)엔 베르당처럼 좁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戰死者(전사자)가 생긴 전투가 달리 없다. 읍 정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고지전, 진지전, 포격전, 백병전으로 쌍방 100만 명이 죽고 다쳤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13만 명분의 유골이 꽉 들어 차 있는 거대한 石造 건물 전체가 棺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베르당 전투를 기획한 사람은 小몰트케(普佛전쟁의 원훈인 몰트케 원수의 조카)가 마른느 결전에서 패배하고 사직한 이후 참모총장이 되었던 팔켄하인 장군이었다. 그의 베르당 전략개념이란 것이 이곳을 '인간 도살장으로 만든다'였다. 고지 점령도, 도시 점령도 아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프랑스 군인들을 이 요새지역으로 끌어들여 도륙함으로써 프랑스의 병력자원을 고갈시키고 전쟁의지를 꺾는다는 무지막지한 전투였다.

이 두오몽 납골당으로 가는 산길 옆에 한 동상이 있었다. 내려서 다가가 보니 「Andre Maginot」라고 써져 있었다. 아, 마지노선을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하는 놀라움! 마지노는 의사였는데 베르당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 나자 지원하여 참전했다가 부상하고 불구자가 되었다. 戰後(전후)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獨佛(독불) 국경선을 따라 마지노 요새를 건설하기로 한다. 고향 베르당에서 벌어진 살육전을 장차전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人命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요새를 생각해낸 것이리라. 인간이란 존재는 역시 과거와 체험의 포로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2차 대전 때는 탱크와 전투기를 이용한 전격전의 등장으로 마지노 요새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독일군은 마지노 선을 우회하여 뒤에서 쳤기 때문이다.

 

출처 :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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