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야기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0-01-08 14: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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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테헤란 路가 수도 한복판에 있어도 한국인들은 이란을 잘 모른다. 다수 한국인들은, 이란이 북한과 친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호메이니라는 이름을 아는 수준이다. 수년 전 중동에 주재하는 한 한국대사를 만났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관련된 책도 번역하고 현지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는 학구파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이 이란을 저렇게 다루면 안됩니다. 이란과 페르샤의 역사를 알면 그렇게 마구 대할 순 없습니다."

영국의 이슬람 전문학자 버나드 루이스가 쓴 "바벨(Babel)에서 드라고만스(Dragomans)까지: 중동을 통역한다"라는 논평집을 읽다가 비슷한 대목과 만났다. 그는 이란이 인류역사, 특히 이슬람 문화에 끼친 막중한 영향력을 강조했다. 이 글을 읽고나니 호메이니 세력으로 대표되는 이란이 아닌 다양하고 풍성하고 교양 있는 문명 건설자 페르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문제점을 가지고, 그것도 서구식-기독교적 관점에서만 본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하고 깊은 나라가 이란이다. 인구는 약 8000만 명, 면적은 한반도의 약 8배인 160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이란의 독특하고 위대한 역사와 문화는 먼저 이슬람과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편하겠다. 이란을 아랍국가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란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아랍국가는 아니다. 이란인들은 아랍족이 아니고 아랍어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의 유럽, 특히 게르만족과 뿌리가 같은 인종이다. 히틀러는 독일사람들의 인종적 뿌리를 아리안족이라 불렀다. 이란과 아리안은 같은 뜻이다.

이란은 이슬람화되었지만 다른 中東국가처럼 아랍화되지는 않았다. 첫째, 언어가 아랍화되지 않았다. 서기 7~8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거의 모든 中東국가들은 고유언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같은 最古의 문명과 언어를 자랑하는 나라들도 母國語를 버리고 아랍어로 넘어갔다. 따라서 자신들의 고유문화와 상당부분 단절되었다. 이슬람은 또 이슬람의 宗敎史를 중점적으로 가르치지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란은 아랍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이슬람을 수용했지만 이란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란어는 독일어나 영어와 비슷한 구조이고 단어도 비슷한 게 많다. 17세기에 비엔나에 파견된 오스만 투르크 대사는 "합스부르그 왕조 사람들은 잡스러워진 이란어를 쓰고 있다"고 오해했다고 한다.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母國語를 지켜갔지만 동시에 아랍문자도 배웠다. 이란의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아랍문자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이슬람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발상한 이슬람은 문화적 깊이가 약했다. 아랍의 이슬람은 이란을 이슬람화함으로써 제2의 도약을 했다. 사막적인 종교가 아닌 문화적 종교, 세계적 종교로 변한 것이다. 메디안-페르샤-파르티아-사산朝로 이어지면서 축적된 독창적이고 풍성한 이란 文明이 이슬람에 수혈되어 이슬람을 생동감 넘치는 종교로 거듭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세계로 퍼져간 것은 사막적(아랍적)인 이슬람이 아니라 페르샤적인 이슬람(Persian Islam)이었다고 버나드 루이스는 강조한다. 중앙아시아, 오스만 투르크, 인도지역이 페르샤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들어갔다.

이란의 이런 문화적 힘은 역사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란은 중동국가들 가운데 독자성을 가장 오래 유지한 나라이다. 다른 中東국가들은 이 민족, 저 민족에 의하여 침공받고 점령되어 문화적 주체성을 오래 지켜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시리아를 예로 들면 약 8000년의 역사를 통해 33개 문명이 교차했다.

이란(페르샤)은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양에 대해서 항상 優位를 지켜오다가 서기 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잠시 점령되었으나 곧 파르티아 제국을 만들어 독립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의 침공도 저지하여 페르샤 지역을 서양화(기독교화)시키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파르티아를 이은 제국은 사산朝였다. 이 제국은 7세기에 시리아에 본부를 둔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점령되어 이슬람화되었으나 이란인들은 이슬람을 페르샤화해버렸다. 우수한 문화를 가진 민족은 저급한 문화를 가진 민족에 의해 정복되지만 그 문화의 힘으로 정복자를 다시 정복해버린다. 이란은 이슬람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셈이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이란 장군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압바시드 왕조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관료, 지식인들은 거의가 이란인들이었다.

13세기에 몽골, 15세기에 티무르의 침공을 받은 이란은 황폐되었다. 이란이 몽골의 西征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인구의 약 반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이 중국의 宋을 점령하고 세운 元의 관료층 안에는 이란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슬람을 믿는 16세기의 몽골 계통 기마군단이 인도를 점령하고 세운 무갈(이란어로 몽골) 제국의 지배층 안에도 이란인들이 많았다. 이란은 주변지역, 즉 中東, 중앙 아시아, 터키, 인도를 밝히는 문화적 등불이었다. 타지마할 등 인도의 위대한 건축물엔 이란의 예술과 기술이 들어 있다.

1501년 이란에서 사파비드 제국이 일어났다. 투르크 계통의 지배층이 이란 사람들을 다스렸다. 무갈 제국과 비슷한 구조였다. 이란인들은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다섯 개의 大제국을 만든 민족이다. 메디안-페르샤-파르티아-사산朝-사파비드 제국이 그것이다.

16~20세기에 中東 이슬람 세계에는 두 라이벌이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사파비드 제국을 세운 이란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중동,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두 차례 비엔나를 포위하는 등 유럽을 위협했으나 이란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영국의 이슬람 전문가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투르크 제국은 문명적 측면에선 이란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현재의 中東도 터키와 이란이 兩大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國父 케말 파샤의 政敎분리 원칙에 입각한 터키는 세속적인 공화국이고 호메이니의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란은 政敎일치의 이슬람 공화국이란 차이가 있다. 인구도 두 나라는 비슷하다(약 8000만 명). 터키는 이스라엘 및 미국과 친하고 이란과는 원수지간이다. 이란이 핵무장하면 터키도 대응 핵무장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란의 이런 독자성을 가능하게 만든 여러 힘중의 하나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이란인들의 자존심이다. 이런 이란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함께 "惡의 軸"이라고 불렀다. 김정일이야 惡의 軸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란을 이런 김정일 정권과 同格에 놓을 수 있는가?

10여년 전 할리우드에서 만든 "300"이란 영화는 페르샤의 大軍을 무찌른 스파르타의 300 용사를 超人으로 만들고 페르샤 군대를 괴물이나 바보멍텅구리 집단으로 그렸다. 이란 사람들이 화를 낸 것이 이해가 된다. 이란에 대해서 무식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역사는 문학, 철학과 함께 교양인의 필수과목이다. 역사공부는 다른 문화와 민족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마음을 넓혀주고 생각을 깊게 해준다.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한 존중심을 심어준다.

부시가 이라크 침공작전을 펴기 전에 버나드 루이스 같은 大家를 백악관으로 초빙하여 몇 시간 강의를 들었다면 다른 전략이 나왔을지 모른다. 당시 미국 CIA 국장 테닛은 최근 회고록에서 "이라크를 왜 굳이 쳐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易地思之(역지사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역사공부이다.

중동에서 이란의 라이벌은 사우디 아라비아이다. 이란은 시아파이고 사우디는 수니파이다. 이 종교 갈등이 중동 전체를 갈라놓고 있다. 시리아, 예멘 내전도 그렇다. 26일자 조선일보는 이 문제를 잘 정리하였다.

<중동의 두 강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갈등은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두 국가가 존재할 때는 아니지만 현재 각각 이들이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7세기 무렵부터 갈라지면서 원수지간이 됐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수니파와 시아파로 쪼개진 건 632년(추정)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면서부터다. 이슬람 공동체는 스스로 후계자를 정해야 했는데, 무함마드의 혈육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시아파가 됐다. 반면 공동체 합의를 통해 적임자를 뽑아야 한다는 이들은 수니파가 됐다.

무함마드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시아파는 무함마드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이하 알리)을 초대 칼리프(정치·종교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丈人)인 아부 바크르를 추대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오른팔이었고, 둘째 딸을 무함마드에게 시집 보내 영향력도 셌다. 결국 수니파 의견이 채택돼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가 됐다. 이후 시아파는 공동체 내의 큰 불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갈등이 노골화한 것은 시아파의 알리가 어렵게 제4대 칼리프에 올랐다가 곧 암살되면서부터다. 그 뒤 알리의 장남 하산마저 수니파 꾐에 넘어간 그의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차남 후세인도 수니파와 치른 전투에서 숨지면서 두 종파(宗派)는 원수가 됐다.

현재 전 세계 16억 무슬림 중 90%가 수니파이고 10%가 시아파다. 정치적 기반과 종파가 밀접하게 얽힌 이슬람 국가들은 반대 종파와 분쟁을 빚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으며, 그 중심에 사우디와 이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실질적 외교 문제로 분쟁을 겪었던 첫 사건은 이스라엘의 국가 인정 문제다. 당시 중동 지역의 최대 이슈는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를 반대하며 사우디·이집트 등 아랍국가들이 일으킨 중동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란은 1950년 이슬람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친(親)서방이자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팔레비 왕조가 이란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로 아랍국가들과의 연대감이 약했다. 언어와 인종도 달랐다. 이란은 인도·유럽계의 아리아인(人)으로 페르시아어를 쓰고, 아랍족인 사우디는 셈족 언어인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문제로 사우디는 이란을 비난했고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양국은 1960년 석유수출기구(OPEC)의 창립 멤버로서 경제적 교류만 유지하는 사이가 됐다.

이란이 왕정제일 때만 해도 양국은 큰 분쟁 없이 지냈다. 하지만 이란이 1979년 혁명으로 반미(反美)로 돌아서고, 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 사우디가 이라크의 편을 들어주면서 양국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이런 외교·군사적 갈등은 최근 시리아 내전과 예멘 내전 등에서 서로 반대편을 지원하는 양태로 전개되고 있다.

양국은 지난 1월 사우디가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국교(國交)가 단절됐다. 사우디가 시아파 시위의 배후로 지목한 알니므르를 알카에다 등 테러범들과 함께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이란인들은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에 불을 질렀고, 결국 양국은 서로 등을 돌렸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지난해 서방과의 핵 협상 타결로 '불량 국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키워가는 이란에 대한 사우디의 견제 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사우디가 이란의 부상에 민감한 것은 중동 지역 맹주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시아파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혁명으로 왕정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신했다. 이후 이란은 다른 이슬람권 왕정 국가에도 공화정 혁명이 이뤄져야 한다며 '혁명 전도'를 추진하고 있다. 사우디는 이 같은 사상이 확산돼 국내외 반(反)사우디 세력의 대규모 시위나 정치 봉기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사우디 전체 인구(2775만명)의 20% 정도는 친(親)이란 성향의 시아파 신자인 데다, 사우디 서쪽의 홍해를 제외한 주변에 예멘의 후티,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시아파 무장단체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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