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에 드리는 글쟁이의 선물

이      름 황천우 작 성 일 2010-09-19 조 회 수 6463

해 빙(단편 소설)

 

 

 

그 날도 기석 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로 찾아들어 토끼와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는 식사를 하기 위해 강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밤이면 오소리들이 산에서 내려와 자신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가축들을 잡아먹어 치우는 바람에 조양강을 끼고 흐르는 강변에, 그 강의 운치 마냥 멋진 집을 지어놓고도 매일 밤을 우리 근처 허름한 초가에서 지내는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기석 씨가 강원도 오지인 정선을 찾아든 지 어느덧 5년여가 흘렀다. 서울에서 힘들게 시작한 사업체가 단단하게 기반을 잡자 그 곳에서의 일거리가 많지 않음을 핑계로 동생 내외에게 맡기고는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인생의 황혼인 70을 목전에 둔 그로서 다시 자기가 온 자연으로의 복귀를 내심 염두에 두고 있는 지도 몰랐다.

 

산비탈을 내려가는 기석 씨의 얼굴로 차가운 강바람이 다가왔다. 아침이면 부딪치는 상쾌한 기운이 그 곳에 즐거이 뿌리내리게 했던 일부였다는 생각을 하며 서울에서는 밟아보지 못할 상큼한 흙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산을 에워싸고 흐르는 강가에 그야말로 그 강의 운치에 딱 들어맞게 집을 지었다. 물론 자신의 거처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찾아와 자신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지인들을 위해 여러 개의 방을 들였다.

자신과 자신의 지인들을 생각하며 가급적이면 자신의 손으로 지으려 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전문적인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손수 했다.

 

방으로 들어가 TV를 켜놓고 무심결에 밥통에서 밥을 뜨는 기석 씨의 귀를 순간적으로 사로잡는 말이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밥을 푸던 손을 멈추고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던 말이 자막으로 아직도 남아있었다.

 

북의 이 진철이 남쪽에 있는 누이동생 이 순애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한 보도인 듯이 보였다.

‘이 진철(73세)’.

그리고 찾고자하는 남의 누이동생 ‘이 순애(70세)’.

헤어질 당시의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00리.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아니 평생을 두고 가슴속에 한 파편처럼 남아있던 이름 석자였다. 이제는 들고 있던 주걱과 밥그릇이 밥통 안으로 떨어진 것도 잊고 자막을 주시했다.

 

온몸이 경직되었다. 마치 집 안 마당에 있는 고목 마냥 그대로 꼿꼿이 굳어진 것만 같았다. 화면이 바뀌고 다시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질 즈음해서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치 동면에서 깨어난 곰이 세상의 변화를 느끼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듯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통 유리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조양강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일제의 통치로부터 해방이 되던 시점에,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 정도였던 시기에서 기석의 기억이 시작되었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갔던 작은아버지께서 살아 돌아 오셨고 또 그 시기에 한 여인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와 함께 기석 씨 주위로 찾아 들었다.

그 당시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경우 열 명에 일고여덟은 죽었던 연유로 작은아버지의 귀향은 그야말로 집안의 경사였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아랑곳 않고 아끼며 키우던 돼지를 잡아 사지에서 생환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동네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후 다시 해방이 주는 느낌을 만끽하며 일상을 보내는 중에 찾아든 사람들이 바로 이 진철의 가족이었다.

 

어린 기석으로서는 그의 가족이 어떻게 그 마을 특히 자신의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포천댁’이라고 불리는 여인과 함께 그 작은 마을을 찾아든 남루한 차림의 가족은 거처를 포함해서 당장의 생계가 어려웠다. 그러던 것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께서 그 어려운 살림을 무릅쓰고 그 가족에게 구석진 곳에 있던 헛간을 방으로 꾸며 내주셨던 일이 그들과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당시 근근이 먹고 살만큼 농사를 짓고 있던 기석의 가족에게 그들의 더부살이는 가뜩이나 열악한 기석의 가정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나 천성이 착한 그들로서는 그들의 동거를 불쌍하게 받아들였었다. 그리고 그 집안의 장손이었던 기석으로서는 비록 피는 달리했지만 자신보다 여섯 살이 연배인 형이 집안에서 같이 산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었다.

 

진철 형의 말로는 자신의 아버지는 독립군이었다고 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에 참여해서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노라고 했다. 또한 한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를 했음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오직 진철 형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나 누이동생에게서는 그의 아버지에 관해 일언반구의 얘기도 들어볼 수 없었다.

 

그 작은 동네의 젊은이들도 처음에는 진철 형의 이야기를 믿는 듯했다. 으레 그렇듯이 부러운 시선으로 또래들이 독립군의 아들로서 진철 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그의 아버지에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진철 형의 어머니를 찾아왔던 사람의 출현과 그의 아버지가 만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연들을 전해 듣고는 그를 대하는 시선이 완벽하게 뒤 바뀌었다.

 

기석으로서는 그의 아버지가 독립군이었던 만주의 아편장수였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그 형과 함께 노는 일이 좋았다. 반면에 진철로서는 나이가 어린 기석을 떠나 자신의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 기석을 이용해 자신의 과대 포장된 출신이 은근히 알려지게 함으로써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리라 생각했었는데 사실이 드러나자 이제는 같은 또래에게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하련만 섣부른 거짓의 탄로가 진철 형의 위치를 밑바닥 수렁으로 내몰았다. 항상 마을의 또래들 그리고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갖은 수모를 당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또한 그 거짓의 대한 비참한 결과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더욱 고단한 생활을 보내야했다. 어린 기석의 눈에도 진철 형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그 당시 진철 형의 얼굴이 성해 날 날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의 어머니는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고 그의 누이동생은 말수가 적어졌다.

 

세월이 흘러 이남만으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국가의 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기석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이장 직을 맡았다. 남보다 특별나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씨 착하고 한문으로 이름 정도나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아버지가 이장을 맡게 된 이유였다. 문맹이 많았던 당시로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철 형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그 즈음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기석의 가족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기석의 아버지가 이장이 되면서 진철 형의 가족은 조금 더 낳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장으로서의 조그마한 직위를 이용해 남들보다도 그들 가족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베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진철 형은 여전히 동네의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은 사실은 또래 젊은이들의 심부름꾼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릴없이 동네 사랑방에서 화투로 소일하고 있는 또래들에게 술이며 담배 심부름 등의 시중을 들어주면서 조그마한 만족감을 느껴야했다.

 

해방과 정부 수립의 기쁨도 잠시 서서히 어른들의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뭔가 행복한 일이 일어날 듯 했던 기분들이 한없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기석도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진철 형을 대문에서 맞이했다. 그냥 기석을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다.

 

“형, 어른들이 왜 저런데? 마치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표정들인데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들을 해주지 않아.”

 

진철이 기석의 손에 잡혀 있는 자신의 손을 그대로 두고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답답해진 기석이 다시 한 번 다그쳤다.

 

“형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거지? 응?”

 

물끄러미 기석의 눈을 주시하던 진철이 기석에게 잡힌 손을 풀고는 그 손으로 기석의 손을 잡고 어두운 곳으로 이끌었다.

 

“너, 꼭 알고 싶어?”

“응.”

 

진철의 말투에는 어두움만큼이나 결연한 기운이 배어있었다. 그 분위기에 맞추어 기석의 답변 또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진철이 자신의 눈 높이를 기석과 맞추느라 약간 몸을 숙였다.

 

“너, 그러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절대로 남들한테 얘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너희 엄마나 아버지에게도 말이야.”

 

기석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스쳐지나갔다.

 

“형, 내 반드시 약속할게.”

“조만 간에 전쟁, 전쟁이 일어날 거야.”

“전쟁이라고!”

 

기석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고성이 나오자 진철이 얼른 손으로 막아버렸고 잠시 후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 해방전쟁 말이야.”

“아니 형, 우리나라 일본에서 해방된 거 아니야?”

“물론 일본에게는 해방되었지.”

“그런데 무슨 해방 전쟁이야?”

“너는 지금 우리나라가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니?”

 

진철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자 기석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연신 끔뻑였다.

 

“지금 말이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는 해방되었지만 다시 그 틈을 비집고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어.”

“그러면 우리나라가 미국이란 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거야?”

 

진철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저기 북쪽에 있는 김일성 장군이 우리를 미국에서 해방시키고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앞잡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거지.”

“미국의 앞잡이가 누군데?”

 

진철은 대화를 잠시 멈추고 다시 기석의 손을 잡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배 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너,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형, 나도 남자야. 한번 약속하면 죽어도 지켜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고.”

“좋아, 그럼 너를 믿고 얘기할 테니 잘 들어둬라.”

 

그 날 밤 어두운 배 밭에서 들은 바로는 지금 우리나라를 미국이란 나라가 그들의 앞잡이를 내세워 다시 일본을 대신해서 지배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독립군 출신의 북의 김일성 장군이 우리의 힘으로 미국과 미국의 앞잡이들을,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들과 그와 친한 사람들, 몰아내고 우리나라만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국민 모두가 주인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기석이 들어도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로 들렸다.

 

“아니, 그런데 형. 그게 무슨 쉬쉬할 문제야?”

“네가 한번 생각해 봐라. 만약 네가 미국의 앞잡이라면 그 얘기를 들어 내놓고 할 수 있겠니?”

 

기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 우리 엄마, 아버지도 미국의 앞잡이란 말이야?”

 

순간 진철이 아차한 모양으로 기석에게 바짝 다가섰다.

 

“너희 엄마, 아버지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워낙 마음이 좋다보니까, 미국의 앞잡이들이 불쌍하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우리나라가 해방 된다면 너희 아버지 같은 분은 그야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진철 형의 말이 모두 옳은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문제였다. 학교고 집 어디서고 미국이란 나라를 지금 진철 형이 얘기한 것처럼 나쁜 나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하면 저희들끼리 그렇게 살면 되지 왜 남을 위해 전쟁을 하겠다는 것인지 몰랐다.

 

아무튼 그 날 밤 이후로 진철 형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타게 원했던 또래들과의 관계개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피하기 시작했고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디를 간다만다 얘기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간혹 늦은 밤에 진철 형 엄마의 진철 형을 꾸짖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고는 했다.

진철 형의 행동과는 달리 어른들의 표정은 갈수록 긴장되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표정을 살피며 진철 형이 이야기한 전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기석으로서는 그냥 전쟁이란 단어만 알고 있었지 그 단어가 주는 의미는 알지 못했으나 어른들의 표정을 보고 전쟁이란 어른들도 무서워할 정도의 고약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요할 정도의 침묵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얘기들이 오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른들끼리 만나면 자주 고성이 오고가고 했다. 얘기인즉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말미에 꼭 후에 두고 보자는 말이 오고갔다.

기석이 보아도 뭔가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었고 그 즈음 진철 형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기석은 도대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 날 저녁도 놀이를 핑계로 집 앞에서 진철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시던 아버지께서 기석을 보고는 절대 멀리 가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한참동안 놀이를 가장하고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진철 형의 모습이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바삐 걸어오는 진철 형의 손을 잡고 어두운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진철 형도 기석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담담하게 기석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기석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낮은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형, 요즈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날 거야. 이 남한의 불쌍한 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북의 김일성 장군이 조만간 양키와 양키의 앞잡이들을 까부수고 모두가 잘 사는 행복한 인민의 나라를 세울 거야.”

 

진철 형의 말은 단호했고 또한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항상 빌빌대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동네 어른들끼리 저렇게 싸우고 그러는 거야?”

“일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인민 해방 전쟁을 비난하니까 저러는 거지. 그러나 두고 봐. 금방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살려달라고 아우성 칠 테니 말이야.”

 

진철 형이 지그시 어금니를 깨어 물었다.

 

“아니, 형. 그렇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 왜들 우리끼리 서로 싸우고 그래?”

“모두 양키 놈들 때문이지.”

 

진철 형의 인민들의 세상을 위한 전쟁론은 확고했고 그의 예언대로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6월 하순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한내로 물놀이하려고 집을 나서는 기석을 아버지가 붙잡았다. 그 뒤에는 엄마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기석은 진철 형이 묵고 있는 구석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댓돌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시간쯤에는 그 곳에 놓여있어야 할 신발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하늘을 아니 온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아버지는 연신 담배를 피워대셨고 곁에서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버지께 되뇌어 물었다.

 

그 날 하루 온종일 그렇게 무거운 침묵으로 날을 보냈다. 밤이 되자 그 침묵은 공포로 다가왔다. 도대체 불을 켤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의 침묵은 낮 동안의 침묵과는 또 달랐다. 비행기 날아가는 굉음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 어색한 순간이 근방에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 내외께서 올라오신 일로 인해 깨어졌다.

 

어두워서 얼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작은 엄마의 얼굴색은 그 목소리로 보아 아마도 완전히 백짓장 처럼 변해있을 듯했다.

사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아버지께서 다시 국방군에 입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께 하소연하고 있는 작은 엄마의 목소리는 울음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아버지는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혀만 차다가는 작은 엄마에게 서둘러 피난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왜 피난을 종용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미리 알고 있는 듯 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작은 엄마의 물음에 침묵을 지키던 아버지께서 두 분이 집을 나설 때 이곳에 그냥 남아있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작은아버지에게 몸조심 할 것을 신신 당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소리와 함께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들려오던 포탄 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들려왔다. 지금까지 근심으로 일관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이제는 담담하게 변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진철 형이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나라가 완전히 해방이 되면 아버지같이 착한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표정이 전보다 그렇게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포탄소리가 정겹게까지 느껴졌다. 이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진철 형의 가족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그 말에 아버지는 다시 한숨으로 일관했다. 기석으로서는 이제는 좋은 세상이 오는데 그새를 못 참고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아쉬움의 한숨으로 받아들였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던 진철 형이 마을에 나타난 때는 인민 해방군이 마을을 점령한 다음날이었다. 멀리 나가지 못하고 집 앞마당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는데 마을 어귀로 들어오고 있는 진철 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은 그 얼굴인데 복장이 특이했다. 인민군 복장과 똑같은 색의 옷을 입었고 검은 장화 같은 신발을 신고 왼쪽 팔에는 빨간 완장을 차고 있었다. 복장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도 상당히 바뀌었다. 팔을 휘젓고 걷는 모습이 흡사 도마뱀이 앞다리를 벌리고 걷는 듯했다.

 

어쨌든 기석으로서는 반가웠다. 급히 진철 형에게 다가갔다.

 

“형, 어디 갔었어?”

“내가 전에 언뜻 얘기했었지. 불쌍한 인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그 일로 여태껏 일하다 온 거야. 그리고 너 앞으로는 나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마. 그냥 동무라고 불러, 알겠냐?”

“그럼 나하고 형하고 동무란 말이야?”

“그래, 우리 인민 공화국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아. 전부다 같은 동무란 말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반드시 동무라고 부르라고.”

 

기석이 재미있다는 듯이 동무, 동무를 되뇌었다.

 

“진철 동무, 그런데 그 완장은 뭐야?”

 

자신을 동무라고 부르고 있는 기석의 말이 조금은 어색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정색을 했다.

 

“그래, 그렇게 동무라고 부르라고. 그리고 이 완장은 위대한 인민 해방군의 전사라는 표식이야.”

“위대한 인민해방군이 하는 일이 뭔데?”

“그야 물론 양키 앞잡이들을 잡아내는 거지. 인민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던 반동 새끼들을 잡아내는 일 말이야.”

 

기석은 진철 형이 대단한 감투를 썼다 생각했다.

 

“형, 아니 진철 동무, 내 아버지한테 형 돌아왔다고 얘기할게. 잠깐 기다려.”

 

진철이 급히 기석의 행동을 제지했다.

 

“기석 동무, 오늘은 바빠서 안 되고 내가 나중에 들르도록 할게.”

 

한마디 내뱉고는 마을 한복판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석은 그런 진철 동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걷고 있는 진철 동무를 마을의 한 부잣집 어른이 발견하고는 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진철 동무가 갑자기 가래침을 내뱉고는 휑하니 걸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석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집으로 들어섰다. 집에 있던 아버지에게 진철 형이 돌아온 일과 그리고 방금 전의 상황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혀를 차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뭔가가 크게 잘못되어지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어딘가를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 진철 형이 만났던 어른뿐만 아니고 여러 명의 마을 유지들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순간 기석으로도 진철 형이 하고 있는 일이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걱정했다. 아버지께서 이장을 맡고 있고 작은아버지께서 국방군에 입대했으니 아버지도 안전치 못하리라 얘기했다. 기석은 이상했다. 분명 진철 형은 자신에게 이야기했었다. 아버지는 더 잘 될 것이라고. 그런데 그 사실을 아버지, 엄마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의 행동은 급했다. 먼저 안방에 있는 다락방의 한 구석을 치우기 시작했다. 요강을 올렸다. 입구 쪽을 어지럽게 여러 가구로 위장을 했다. 그리고는 자식들을 모두 모아서 다짐을 받아냈다. 누가 와서 아버지를 찾거든 전혀 모르겠노라고 얘기하도록 강요했다.

 

진짜 엄마의 말대로 몇 번인가 진철 형처럼 빨간 완장을 찬 아저씨들이 집에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누군가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급히 다락으로 올라가셨고 엄마가 손님을 맞이했다. 물론 엄마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지만 그럴수록 기석의 마음은 어지러워졌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미제의 앞잡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모르는 아저씨들 대신 진철 형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 날도 기석은 멀리 나가지 못하고 집 앞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마을 안쪽에서 진철 형이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기석은 얼른 진철 형에게 달려갔다.

 

“형,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진철이 표정을 험상궂게 짓다가는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얼굴을 위장했다.

 

“형이라고 부르지 말고 동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응. 그런데 너는 혼자 뭐 하는 거냐?”

 

기석은 진철 형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손을 잡아끌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형, 아니 진철 동무, 그런데 해방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아버지같이 착한 사람이 잘 될 거라고 했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인민해방군에서도 너희 아버지 같은 분을 찾고 있어.”

 

그제야 기석의 의문이 풀리고 있었다. 그렇게도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고는 했던 일은 아버지를 해코지하려 함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를 잘 살게끔 해주려고 했는데 아버지와 엄마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 하니 지레 겁을 먹고는 숨고 했다고 말이다.

기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기석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주고 다음에는 형이 직접 와서 그런 뜻을 아버지께 전하라고 했다. 진철 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 아버지를 한참 찾았는데 집에는 안 계신 모양이더라고. 그래, 지금 어디 계신 거냐?”

 

기석은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진철 형의 귀를 잡고 지금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락에 숨어 계시다고 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진철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는 기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일행들과 함께 마을을 벗어났다.

 

바로 다음날 방안에서 동생들과 놀고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아버지는 급히 다락으로 숨으셨고 엄마가 대문으로 나갔다. 기석은 문틈으로 밖을 엿보고 있었다. 대문을 열자 여러 사람들, 총을 멘 인민군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들 틈에, 아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진철 형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모습을 살피며 이제는 아버지가 다락에 숨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콩당콩당 뛰기까지 했다.

 

잠시 뭔가를 얘기하는 것 같더니 고성이 오고갔다. 기석은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소리와 ‘반동새끼’라는 고성을 동시에 들었다. 순간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성이 이어지더니 진철 형을 필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런 진철 형의 목을 부여잡았으나 이내 마당으로 나뒹굴었다.

 

순간 기석은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그를 본 진철이 고개를 돌렸다. 기석은 그런 진철을 외면하고 마당에 쓰러진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엄마는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평소 기석과의 놀이로 집안의 구조를 자기 손바닥보다 훤히 알고 있는 진철이 새끼가 다락으로 통하는 문에 서 있었고 일부는 다락위로 올라갔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 기석은 있는 힘을 다해 진철에게 돌진했다. 그대로 머리로 진철의 배를 들이 받아버렸다. 진철이 잠깐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이내 그 큰손으로 기석의 얼굴을 후려쳤다. 순간 옆에 있던 한 남자가 기석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절규의 소리도 들렸다. 기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일이 종료되어 있던 상태였다. 대문가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엄마의 곁에서 이웃 아주머니들 몇 분이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진철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마음 굳게 먹으라는 말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는 기석의 양팔을 잡고 엄마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둘러싸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입에서는 절망적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번 끌려가면 그걸로 끝이라는 이야기였다.

잘못이 있고 없고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일단 끌려가면 그걸로 끝인데 기석의 아버지로서는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고 또 동생이 국방군에 가 있는 만큼 살아올 확률은 없으니 마음 크게 먹고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거의 실신하다시피 한 엄마를 방으로 모셔다 눕히고 기석은 뒤꼍으로 가서 낫을 찾았다. 그 낫을 들고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진철이 새끼를 죽인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초저녁에 시작해서 완전히 어둠이 깔릴 때까지 낫을 갈고는 그 낫을 부엌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마치 실성한 사람 마냥 흐느끼고 있었고 어린 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같이 따라 울었다.

 

기석은 되는 대로 엄마와 동생들에게 밥을 차려주고는 진철이 새끼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서자 밤에는 무서워서 홀로 나다니지도 않았던 밤길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새벽이 되도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낫을 들고 온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진철이 새끼를 찾을 수 없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그 새끼들의 본부가 다른 마을에 있었다고 했다.

 

지난밤 한숨도 못 자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눈을 멀뚱거리며 누워있는데 대문 밖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또 진철이 이 새끼가 왔는가 하는 생각에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서 낫을 들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간 기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했다.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비록 성해 보이지는 않으나 아버지께서 마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오시고 계셨다.

엄마가 바로 아버지의 한쪽 팔을 끼셨다. 기석도 손에 들려있는 낫을 안마당에 던져버리고는 바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많은 상처가 보이지 않았으나 무던할 대로 무던한 아버지가 남의 부축을 받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안방에 뉘였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되었다. 하나는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일과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가서 이렇게 살아왔다는 일이 기적이라고 했다.

 

기석은 혼돈스러웠다. 진철이란 인간이 그래도 인간의 탈은 쓰고 있는 놈이라 차마 아버지를 어쩌지 못하고 풀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난밤에 그 인간을 죽이지 못한 일이 천만 다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엄마에게 얘기하는 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인민공화국에 참여하고 있는 이웃 마을 사람이 아버지를 적극 변호했다고 했다.

기석의 아버지는 비록 양키의 앞잡이들에 의해 이장 일을 맡고 있었으나 본인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닌 만큼 그 놈의 양키 앞잡이 새끼들에게 그 죄를 물어야 할 일이고 기석의 아버지같이 청렴하고 가난한 사람이 통일된 인민공화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더불어 동생이 국방군에 입대한 일도 있고 하니 더욱 충성 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진철이 새끼의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진철이 새끼 얘기가 나오고 안 나오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셨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진철이 새끼는 기석의 마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간혹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옆 마을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그 짓거리를 계속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가면서 그 새끼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아버지의 말로는 아마도 북으로 인민군과 함께 올라갔을 것이라 했다. 그 짓을 해놨으니 이제는 더 이상 남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하셨다.

 

그 후에 아버지는 그때의 육체적인 후유증을 앓으셨고 그리고 그들에게서 잡혔다가 살아 돌아온 일에 대한 주위의 의심의 눈초리를 한동안 받으며 사셔야했다.

 

 

강 가장자리에 떠 있는 얼음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던 것이 봄이 가까워 오면서 서서히 녹기 시작해서 이제는 가장자리 일부에만 얼음이 남아있었다.

 

아버지께서 그 당시의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으로 불편한 생을 일찍 마감하셨을 때는 어린 시절 갈아둔 그 낫으로 이 세상 끝까지 이 진철을 쫓아가 결말을 보고자 했었다.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이남에 살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그 어디에서고 이남에 살아 있다는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차마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해놓고 이곳에 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조금은 허탈했었다.

그래서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을 통해 이북에 있는지 생존여부도 확인해 보았으나 종국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그 곳에 살고 있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얘기를 전해 들었었다.

 

진철에 대한 증오를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가는 중에 기석 씨가 정선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과거의 일은 과거로 묻어버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이미 기석 씨도 60이 넘은 나이였건만 아직도 이진철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고 가슴 한 쪽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이제 그 나이 되면 모든 것 훌훌 털어 버릴 만한 나이였는데도 말이다.

 

어머니의 발인 전날 다소 늦은 밤에 한 승려가 찾아들었다. 으레 상갓집을 찾는 승려들이 간소하게 조의를 표하고 영정 앞에 앉아서 염송하는 것과는 달리 그 승려는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건성으로 조의를 표하는 일반인보다도 더욱더 진지하게 고인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상주인 기석 씨에게도 맞절로 애도를 표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기석 씨는 그 승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움찔했다. 얼굴에 은은하게 주름이 싸이기 시작한 한없이 평화로운 표정의 여승이었다.

 

예를 마친 여승은 빈소 한 쪽으로 비켜 앉아 목탁을 두드리고 이내 염송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나 청아했다. 옆에는 다른 문상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건만 그에 아랑곳 않고 여승의 염송소리가 상갓집을 뒤덮었다.

댓글쓰기
  • 이      름
  • 비밀번호
  • 댓글쓰기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00자 이내로 써주세요.
  • 인쇄

COMMUNITY

커뮤니티

민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