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민족연구소,그 배후가 누구냐?

이      름 작 성 일 2009-11-05 조 회 수 3461

박정희

 

 

개새기들이 연구소를 차린 개민족 연구소가

어느 시폴놈의 사주를 받아서 만고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각하를

친일파로 묘사하는지 모르겠다.

그 뒤의 끄나풀이 도대체 어떤 놈이더냐?

 

이 시폴것들!!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돼질 놈들.

만주군은 공산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장개석 군대가 세운것으로

어째서 일군과 같은 것이냐?

그리고 나중에 박정희가 광복군의  3지대 신현준 대대휘하의 2중대장을 하면서

조국독립에 힘쓴 이야기는 왜 빼먹냐?

이 버러지 같은 X넘들아!!

네넘들이 그래놓고 다리 뻗고 살텐가?

 

민족의 영웅, 위대한 박정희 각하, 만세.

******일부 전기에서 발췌*****

 

팔로군 (중국 공산군)을 상대로 싸웠던 박정희는 1945년 8월 17일에야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즉 해방이라는 소식이 만주의 서쪽 변방 열하성에 있는 박정희에게 전해진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박정희는 같은 8단에 근무하던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상위 신현준, 중위 이주일 등과 상의해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려면 봉천을 경유하는 것이 정상적 경로지만, 봉천에 소련군이 진주해 있을 가능성이 있어 북경을 거쳐 먼 길을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박정희 일행은 한달여 만인 1945년 9월21일께 북경에 도착했다.

박정희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경에 일본군에 복무하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북경에 도착한 박정희는 그때까지도 중국에 주둔하던 "한국 광복군"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광복된 뒤에 광복군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쑥스러워했다.

 

광복군 장교가 되다

 

그때까지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주둔 일본군 내 있던 10만여명의 조선군 장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본진은 귀국하지만, 일부 성원을 남겨 중국국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군 내 조선인 청년들을 조직하는 사무를 관할하기 위해 1945년 11월1일 박찬익(朴贊翊)을 단장으로 하는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조직했다.

 

 박정희가 도착한 북경에는 최용덕(崔用德)을 지대장으로, 이성가(李成佳) 등을 참모로 한 북평잠편지대가 설치되었다.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 였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신현준이고, 1중대장 이주일 그리고 2중대장 박정희 였다.

 

 

박정희는 광복군 생활을 몇달간 하다가 1946년 5월6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청빈했던 교사이기도 했다.********


사진/ 대구사범학교 (고등학교)여름, 고향 구미에서 어머니 백남의와 함께/ 문경보통학교 시절의 박정희 교사/ 교사생활을 그만둔 뒤 만주군관학교 시절에 문경을 방문하여 제자들과 함께 선 박정희(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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