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슬라브계 폴란드 사람으로 세계 최초로 58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 되어 27년간 100여 나라가 넘는 지구촌을 순회하면서 ‘사랑과 화해’의 포교활동을 기록적으로 수행한 위대한 종교지도자이다. “중세의 교회 지배시대를 빼면 요한 바오르 2세 만큼 당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황은 없다” BBC가 바친 서거의 헌시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이념과 민족의 갈등을 치유하려한 평화와 화해의 시도였다. “세계의 목자”로서 그는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지난 97년 리바아와 수교를 하였고, 98년에는 쿠바를 방문해 “미국이 37년간 실시한 쿠바 경제제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으며, 99년 멕시코에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윤과 시장의 법칙만을 고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있다!”라고 경고하였다. 미합중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해서도 “무력 공격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과 긴장만 고조시키는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99년 코소보 전쟁 때도 특사를 파견해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고 평화를 호소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를 사랑해야!!”(1988년 세계 평화의 날)
264대 교황이 된 보이타와 추기경이 바로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는 행동하는 교황으로 8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윤리 신학자였다. 교황 취임 3개월 만에 지난 79년 1월 첫 행선 방문지를 조국 폴란드를 택하고 공산 조국의 민주화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한국과의 인연도 아주 각별하다. 지난 84년 카톨릭사에 유례없는 103명의 성인이 탄생한 시성식을 거행하였고, ‘89년엔 세계성체대회 참석차 방한하였다.
그는 평생 세계 방방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지난 ‘81년 6월 바티칸시티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연설도중 저격수(괴한)에 피격당하여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신껏 변함없이 세계 평화의 사도로서 지구 순례를 계속했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는 끝내 러시아, 중화민국, 조선 인민공화국은 순례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교황청 연감’에 의하면 현대의 교황은 로마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서 서유럽의 총 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바티칸의 원수, 하느님의 종 등 모두 9개의 직위를 갖고 있다.
즉, 전 세계 교회에 대해 교도권, 신품권, 통치권을 가진 교황은 공로와 과오를 함께 가진 역사속의 교황 역할을 뛰어넘어 “지구촌의 영적 스승”으로 역할을 극대화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티칸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대는 전원 스위스 용병 출신으로 불과 120명 수준이나 교황이 가진 정신적 권위는 더욱 더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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