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 혁명!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5-04-18 21: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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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명 현 강남구의회 의원 4.19 혁명은 지난 1960년 4월19일 이승만 정권의 3. 15 부정선거를 규탄코저 전국의 젊은 대학생들이 중심되어 궐기한 역사적 기념일이다.

그 바람에 이승만은 대통령 직을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이기붕 가족은 집단자살로 최후를 장식하였다. 그러나, 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은 신파 장 면 국무총리와 구파 윤보선 대통령과의 끊임없는 내분과 갈등으로 국정의 방향이 흔들릴 정도로 연일 민원성 데모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틈바구니를 이용해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장군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 당시 우리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불과 83달러였으며, 6.25 전쟁 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세대 당 가족수가 평균 5인 내지 6인 이상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80% 가량이 문맹이었고 매년 봄이 오면 ‘보리 고개’라는 식량난으로 굶주림에 시달려 일부 국민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시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박정희 군사 정부는 미국에 구걸하다 시피 하여 미 잉여농산물을 수입하여 전국에 식량배급을 실시하였고, 동시에 분식장려책과 산아제한을 적극 권장하였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월남전에서 우리가 벌어들인 외화가 총 10억달러를 웃돌자, 1973년 사상 최초로 1인당 GNP가 373달러가 되었다.

“북한은 가난해서 거지가 득실거린다!”는 대민 선전을 정부는 의도적으로 하면서 국민들의 고통을 달래었다.
그래서, 북한을 의식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정유·화학·시멘트·철강 등의 전략적 기간산업의 설비구축에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특수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은 70년대 중동을 비롯한 해외건설의 붐을 일으켰고,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큰 소득이다.

지난 60년대 후반기에 국내에서 냉장고와 텔레비전 생산하였다는 사실만으로 국민들은 기뻐하였다. 동시에 인력 수출이 본격화 되었다.

간호사, 광부, 병아리 감별사, 외항선원, 태권도 사범, 건설기술자, 용접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인원이 해외 진출하였다. 그러자, 가뭄에 단비가 오듯이 많은 외화가 국내에 송금되어 초기 민간자본이 기업의 크나큰 밑천이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수출 신화의 인물 대우 김우중 회장이 활약,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와이셔츠 한 장에 불과 1달러 받고 수출하였다.

최근 우리의 수출액은 연간 2000억불에 육박하고 있으며, 품목도 자동차, 선박, 전자제품, 플랜트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세계 10위의 교역 국가가 되어 자랑스럽다.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던 국민을 연간 소득 2만불 목표로 30여년 만에 성장시킨 기반마련에 헌신적 공로를 한 4.19세대에게 충심으로 노고를 치하하며 감사한다!!

이제부터는 젊은이들이 세계무대에 진출하여 우리의 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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