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0-19 15: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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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한국거래소 공공기관 지정 해제를 요구하며 갑자기 사퇴의사를 밝힌 한국거래소 이정환 이사장이 이 정부 출범 뒤 온갖 사퇴 압력에 시달려왔다고 폭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메일과 사내게시판을 통해 정부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검찰 압수수색 수사와 감사기관의 압박, 그리고 금융정책 당국의 집요한 협박과 주변을 압박하는 것도 모자라 제도와 원칙까지 바꿔 자신을 괴롭혀왔음을 성토하는 사퇴의 변을 남긴 것이다.

얼마 전 있었던 김제동의 스타 골든벨 MC 하차 역시 정권 외압설과 무관하지 않다.

김제동 사퇴는 여전히 정권의 관여 여부가 뜨거운 이슈가 되어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중이다.

손석희의 ‘100분 토론’ 하차설은 아직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임에도 네티즌들의 첨예한 관심을 받고 있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없었는데도 자발적인 관심사안으로 부각된 경우다.

정권 탄압 구호가 제일 많이 쓰이고 있는 현장은 역시 정치권이다.

엊그제 민주당 김종률 전의원의 의원직 상실형을 정권탄압이라고 성토하는 야당지도부의 주장을 접했다.

김의원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정권이 바뀐 이후 상고심에서 유죄가 됐다며 ‘하급심보다 낮은 형량은 몰라도 상급심 형량이 높은 경우는 정권의 외압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김의원 개인에게는 매우 안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야당 지도부가 제시하고 있는 ‘탄압 근거’는 쓴 웃음을 짓게 했다.

김 의원의 억울함을 성토하는 민주당이 여당이었던 지난 17대 총선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상대방에 의해 말도 안되게 시달리던 끝에 피눈물나는 재판 결과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지나간 기억이 오버랩 됐기 때문이다.

정권탄압, 낙하산 인사, 사퇴압력 등의 외압 스캔들.

이명박 정권하에서 처음 거론되는 생경스런 일은 아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더 이상 새삼스러운 주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권력의 부침에 따라 수반되는 자연스런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에 결코 무리가 없을 만큼 일종의 순환고리로 반복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정권은 국민주권 이양을 전제로 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는 쪽이 갖게 되는 국가 운영 권한이다.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 운영의 권한을 넘겨받는 대신 모든 책임을 지도록 돼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권력 추구가 정치의 속성에 포함되는 이상 정권 교체 이후 공직사회 인사로 혼란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살생부가 도는 등 살벌함이 난무하는 인사 갈등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효율적 업무 추진에 있어 팀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구성원간의 조화를 염두에 둔 인력의 재배치가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정권이 교체되면 전임 정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세력이 뒤로 물러나야 하는 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백이숙제의 정절이나 불사이군의 정몽주나 성삼문이 사회적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건 각각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킨 의리와 정절이 높은 가치로 인정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들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굶어죽거나 처형됐다. 철학이 다른 권력을 수용할 수 없었던 그들 나름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고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설득되지 않는 ‘적’을 가장 현명하게 처분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실패한 정권이었든 성공한 정권이었든 자신의 철학에 따라 동의하는 과정이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 중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현 정권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전 정권의 방향을 고집하거나 현정부에 대한 문제점 찾는데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전임대통령과 철학을 같이 했던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의 실익을 따져보자. 본인은 물론 새 팀을 짜는 입장에서도 도움 될 일이 없다.

서로 다른 철학과 안목이 존재하는 한 국정 운영에 있어서의 엇박자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 부담이 되기 십상인 점도 고려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이런 저런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길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외압이나 정권 탄압에 대한 아우성이 도출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정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과 똑같은 철학을 가진 사람들로만 채우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효율적인 측면은 수월해질 수 있겠지만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에 대한 폐해엔 속수무책이 될 수도 있다.

또 미래사회의 가장 큰 덕목인 포용성과 다양성 포기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점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권력의 가장 큰 적은 오만함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권력의 핵심부에서 힘겨루기 하는 모습이 세상 밖으로 노출되는 건 진정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악재’가 되기 쉽다. 자칫 독선과 오만으로 비춰질 공산 역시 크다는 측면에서 힘 가진 이들의 독선과 오만을 경계하라는 충고에 좀 더 세심한 배려와 고려가 있어야 하겠다.

특히 지나친 힘의 압박은 그에 반하는 세력으로 하여금 필사항쟁 구도로 뭉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법과 원칙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사람을 걸러내거나 진출시키는 게 있어 법과 원칙이 최대한도로 존중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모두를 설득 할 수 있는 명분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숙한 미래사회에 대한 희망을 쌓을 수 있게 된다.

최소한 자신의 설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당장 노트에 기록이라도 해두길 바란다. 잊지 않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 됐을 때 이 같은 폐단은 반드시 근절시키겠다는 다짐이다.

복수의 화신(?)이라도 된 양 살생부를 치켜든 형상은 더 이상 안된다.

전임정권을 난도질하고 다음 번에 비슷한 처지가 되어 와신상담 하는 이런 식의 답습은 이미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종식으로 끝났어야 할 구태다.

이제 더 이상 구시대 망령으로 이 시대를 망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정치의 긍극적인 목적을 늘 명심하고 있는 것도 한 방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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