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세웠으면 계속 도전하라는 부모님의 따뜻한 격려로 꿈키워"

안은영 / / 기사승인 : 2009-11-08 15: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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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조 성동구청장 '꿈이 있어 아름답다' 민선 4기를 지내며 서울 성동구를 이끌고 있는 이호조 구청장이 평생을 공직자로 살아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꿈이 있어 아름답다’란 제목의 책자를 펴냈다. 벽촌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에서부터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1급 공무원까지 오른 흔치 않은 삶을 담은 그의 공직생활 45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에 <시민일보>는 모두 10차례에 걸쳐 이 구청장의 자서전을 장별로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주)

1. 꿈을 키운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영천군(지금은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높이 솟은 앞산과 뒷산에 늘 구름이 걸려 있다 하여 ‘운산(雲山)’이라고 불리던 산촌이다. 동양 최대의 천문대가 있는 청송과 영천의 경계인 보현산 줄기에 있는 운산은 50여 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로 경주이씨 집성촌이었다. 운산은 왜가리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매년 봄이 되면 왜가리를 보기 위해 여러 학교에서 소풍을 오는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유년 시절엔 학교가 파하면 소 먹을 풀을 베거나 땔감을 찾아 지게를 메고 산과 들로 나갔다. 당시의 시골 농가가 다 그렇듯이 일손 하나라도 아쉬운 시절이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지게를 메고 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만 부모님께 칭찬을 받고 싶은 욕심에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묵묵히 풀을 베고 나무를 했다.

한번은 소 먹일 풀을 베다가 낫에 손을 다쳐 피가 난 적이 있다. 많이 아팠지만 아버지와 형들에게 ‘사나이 답다’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일부러 웃기까지 해서 다들 놀라게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막내아들 도시락만큼은 쌀밥을 싸주시려 무척이나 애를 쓰셨고 읍내에 나가시는 날이면 자주 책을 구해 오셔서 우리 형제들이 번갈아 읽게 하셨다.

우연한 계기가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될 때가 있다. 나에게는 큰형님이 건넨 한 신문 광고가 그러했다. 중학교 3학년 말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난, 대구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경북대학교 사대부고에 가고 싶었다.

어느 날 저녁, 큰형님께서 길에서 주워 왔다며 꼬깃꼬깃한 신문지를 건넸다. 국립 체신고등학교 입학 요강이 적힌 광고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상황에서 졸업만 하면 공무원으로 취업되는 체신고등학교에 가보라는 형님의 조용한 권유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 체신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체신부 공무원에게 필요한 공부만 하는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매력이 없었다. 내 꿈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오신 큰형님의 뜻을 쉽게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부모님께 부담을 주지 않고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는 절박한 심정도 들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체신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특차로 선발되는 체신고등학교 입학시험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경쟁률이 무려 70대 1을 웃돌았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치열한 경쟁을 뚫고 체신고등학교 업무과 장학생으로 합격하였다.

체신고등학교 입학으로 영천을 떠나 서울로 떠나게 될 때 나에게 큰 용기를 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저녁, 부모님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서울로 떠난다는 설렘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긴장으로 내 머릿속은 복잡한 상황이었다. 나는 부모님 앞에 앉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아들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본인은 이루지 못하셨으나 막내아들만큼은 큰 포부와 꿈을 잃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어머니는 “목표를 정하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노력을 게을리 해서도 안된다. 힘들어도 우리 호조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라고 하시며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이불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새벽녘 용산역에 도착했다. 시골에서 소 꼴 베고 농사일만 하던 어린 학생의 서울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학교 근처인 서울 용산의 도화동에 방을 구했다. 차가운 바람을 겨우 피할 정도의 아주 작은 단칸방이었다. 그곳은 수도가 없어서 물이 필요하면 공중수도가 있는 곳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했었다. 그렇게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길러온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취업한 곳은 영등포 우체국이었다. 그런데 내겐 대학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동안 배운 수업 내용이 체신부 취업에 필요한 과목 중심이었고, 고작 일주일에 한두 시간 배운 국어, 영어, 수학실력으로는 대학 입학시험을 보기에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렇게 직장만 다니기에는 너무도 아쉬움이 컸다. 더 큰 꿈을 위해 대학에 꼭 진학하고 싶었다.

당시 체신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야간대학에만 원서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성균관대학교 야간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서를 내고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성균관대학교는 50대 1이 넘을 만큼 경쟁률이 치열했다. 대학 입학시험을 본 후 한동안은 참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 되었다. 합격이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운 좋게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대학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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