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체국 말단 직원에서 사무관으로
체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등포 우체국에 취업해 처음 맡게 된 일은 창구에서 우표를 파는 업무였다. 영등포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성균관대학교 야간 대학에 다녔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다 보니 직장에서는 ‘땡’ 하자마자 퇴근하는 예의 없는 신규 직원이었고,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자주 늦는 단골 지각생이 되어야 했다.
이 상태로 계속 학교를 다니다 보면 학교생활도, 직장생활도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사정을 말씀드려 우표판매 업무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는 발착계 업무로 옮겼다. 하지만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에는 역시 쉽지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학교와 가까운 광화문 전화국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들었다. 9급 공무원으로 일을 하면서 대학생이라는 자부심도 컸지만 ‘이것이 나의 장래에 어떤 도움이 될까?’라는 회의도 자주 일곤 했다. ‘ 그냥 이대로 광화문 전화국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너무 충격적이고도 희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광화문 전화국에 같이 근무하고 야간대학에도 같이 다녔던 이원종(前 서울시장) 선배와 체신고등학교 동창이자 성균관대에 다니던 김태호(광주대 교수) 동기생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세상을 너무 좁게 생각하고 살아왔구나!’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행정고시에 패스할 수 있을까?’ 라는 자신감 없던 생각은 ‘시도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로 금세 바뀌었다. 같이 근무하고, 함께 야간대학에 다닌 동료도 해낸 일인데,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바로 고시 준비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영어책부터 구해 무작정 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방대한 분량을 공부할 생각을 하니 행정고시 합격까지가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특히 가난과 싸우고 시간과 싸우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처지다 보니 더 까마득하게만 보였다.
그러던 중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야하는 시기가 되었다. 잠시 책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마음이 급했던 난 고시 공부를 중단할 수가 없었다.
1967년 1월19일, 50사단 대구 성서훈련소에서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배속이 되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사물함 속에는 늘 고시 공부 책을 넣어두고 틈이 나는 대로 공부를 했다. 주말에도 외출도 나가지 않은 채 공부에만 몰두 했다.
그렇게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69년 12월 다시 광화문 전화국에 복직했다. 다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절로 돌아왔지만 군대에서 키운 의지와 끈기로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고시 공부에 매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사방이 암흑처럼 느껴질 만큼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다. 오로지 고시 합격만이 내 삶의 빛이 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군 제대 후 반년만인 1970년 6월 처음으로 행정고시 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1차 낙방이었다. 1차 합격선이 78점이었는데 77.5점을 받아 불과 0.5점 차이로 떨어진 것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근소한 점수로 떨어졌으니 아쉬움이 컸다. 실수로 틀린 문제들이 꿈에 나타나 괴롭히기도 했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날이 계속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제 합격이라는 정상까지 거의 다 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직장 생활이 공부에 지장을 주는 것 같아 수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사표를 냈다.
그때가 1970년 8월 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 중 절반을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부쳐 드리고, 나머지 절반은 홍릉에 있는 사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데 쓰기로 했다. 독서실에서 기거하는 동안 정말 독하게 공부했다. 시간과 돈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아침은 점심 겸해서 10시경에 먹었고, 저녁은 5시에 먹었다. 밥 먹는 시간을 빼놓고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을 했다.
드디어 시험일이 다가왔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시험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침에 시작한 시험은 오후를 지나 해그림자가 다시 길어질 때가지 계속 되었다. 장시간의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처음 보는 주관식 문제가 시험 결과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불안한 생각만 커졌다.
난 이번에도 합격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 한 번 더 이를 악물자!’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서울생활이 어려웠던 난 합격을 자신하는 친구들로부터 고시 교재를 빌리고 독서실 짐을 꾸려 고향으로 내려갔다.
영천으로 내려간 나는 셋째 형이 있는 영천군 대창면사무소 근처에 방을 얻어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합격을 기대하지 않았으니 발표 날짜에도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뛰어나온 형이 화장실에 있던 나를 크게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슨 일인데 그렇게 아침부터 내 이름을 크게 부르냐고 형에게 물었다.
“호조야! 합격이다. 합격이야. 네가 행정고시에 합격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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