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수용소 이야기!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1-09 18: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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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우리는 흔히 미국을 역사가 200년밖에 안되는 신생국가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바꿔 말해서, 개국 초기부터 정부의 행정관련 기록들이 어느 나라 보다 잘 기록되어 보관되어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서고에는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기록들 역시 잘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부끄러운 역사들을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내놓고 다시 평가를 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이다.

특히 인종차별과 관련된 수정 헌법들은 법학과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노예제도의 지속을 위해 의회에서 사용된 논점들이나 아시안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을 합법화 하는 법령들에 대한 분석은 미헌법 강의에 있어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핵심들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내 일본인들의 집단 수용소 감금 사건은 몇가지 이유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첫째, 그 배경에 있어 전쟁중의 위험관리 차원보다는 아시안 특히 일본계(일본계 미국인으로 일본인과 구분된 의미이며, 특히 80%이상이 미국에서 태어난 ‘닛세이’로 미국 시민권 자였음) 들과 같은 아시안들에 대한 인종혐오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점과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교포들 역시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함께 고통을 겪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전국에 걸쳐 약 12만 명에 이르는 일본계가 강제로 수용되었던 이 사건은 진주만 공격 다음해인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발단이 된다.

하지만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을 보면 인종혐오적인 배경이 여러 곳에서 발견 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통령의 명령은 각 지역의 군사 책임자에게 작전지역을 구분하고 작전지역내 적대 세력에 대한 강제퇴거 및 수용에 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게 되는데 이를 집행함에 있어 지역별로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 할 수 있다.

그 예로 십만에 가까운 캘리포니아 거주 일본계는 전원이 강제로 이주되어 수용된 데 반해 15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하와이의 일본계는 오직 1500명 정도만이 수용소 생활을 한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하와이의 일본계가 지역의 주요 사회구성원으로 같은 법이라도 인종혐오적인 부분이 배제된 채 적용 되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토에서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이주 초기 중국인들이 당했던 인종혐오는 그 뒤를 이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에게로 이어졌고 이런 분위기는 백인과 몽골계 아시안(통상 중국계, 일본계, 한국계를 지칭)의 혼인을 금지하기 위해 1905년 통과된 캘리포니아 주 법령이나 그 다음해 일본계 학생들을 분리시켜 차이나타운으로 강제 편입시키기 위한 시 조례 등을 통해 잘 엿볼 수가 있다.

아시안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은 계속되었다.

강제수용 조치가 이루어진 1942년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에서는 "독사의 새끼는 독사이듯이 일본인의 자식은 일본인일 수밖에 없다"고 인종문제를 선동했는가 하면 오스틴이라는 농작물 관련 협회 회장은 한 신문을 통해 강제 수용으로 비게 되는 일자리들을 오히려 반기고 있는듯한 입장을 발표하여 사건의 핵심이 따로 있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해당 업무를 담당 하던 한 관리는 자신의 편지에서 고아들의 경우에는 단 한 방울의 일본 피라도 흐르면 붙잡아서 강제수용 조치를 했었다고 밝힌바 있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캘리포니아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존 드윗 장군은 의회 청문회에서 일본인들은 미국 시민권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위험한 존재이며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결코 안심할 수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계들 모습은 백인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었다.

백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조화를 이루며 공생 하려는 노력의 모습들이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많은 이가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며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는데 전체의 80%가 미국에서 태어난 2세와 3세들 이었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군에 입대하여(미 군 당국이 입대를 허락한 이는 소수였다)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이는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는 대표적인 사례들이었다 볼 수 있다.

일본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단 수용은 강행 되었다.

그리고 강제 수용소에서 이들의 생활은 매우 열악했었다고 한다. 사전 경고 없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소거 명령이었기에 간단한 옷가지만을 챙기고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특히 겨울철 온도가 영하 수십도까지 떨어지는 위스콘신 수용소에서의 고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추위와 전염병 등으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한다.

1945년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제 수용조치는 인종차별에서 비롯되었다는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끝이 나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기존의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살던 집과 터전은 이미 모두 파괴 된 후였다.

경제력이 전무했던 터라 결국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돌아 갈 곳이 없어 수년 동안 수용소에서 더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인권단체들과 일본계 후세들은 이들의 권리회복을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하게 되고 결국 의회와 대통령(로날드 레이건 그리고 아버지 조지 부시)으로부터 공식 사과와 함께 실질적인 보상도 받게 된다.

최종적으로 1992년 9월에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모자라던 추가예산4억 달러까지 편성하여 82,210명(연고가 파악 안 되는 자는 제외 되었지만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까지도 모두 포함되었음)의 피해자에게 1인당 2만 불의 보상금 지급을 완료하면서 이 역사적인 사건은 일단락을 맺게 된다.

일본계들을 향해 이루어진 이 대규모 인종 혐오 사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본인들이 당했으니 우리는 상관없다라는 식의 반응은 바람 직 하지 않다.

전쟁 대상국이 일본이었기 때문이라는 빌미는 제공 했더라도 강제수용의 주된 배경은 동양계의 배척이라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외국인 백만 시대의 우리에게 다 문화 다 인종사회에서의 인종 편견이 얼마나 큰 문제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편견에 의한 사람차별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재난이라는 역사적인 교훈을 말이다.

그들의 상처는 이제 치유 되었다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흉터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09.11.01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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