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아일랜드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1-09 18: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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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지난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미국으로 오는 거의 모든 이민자들은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왔다.

긴 시간 동안의 항해는 그들을 무척이나 지치게 만들었지만 뉴욕 항에 우뚝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는 순간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라는 희망에 쉽게 젖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민국이 있는 ‘엘리스 섬’에 상륙하여 입국 절차를 밟게 되는데 아마도 미국인 대다수의 조상들은 이런 이주 경로를 통했을 것이다.

동부에 ‘엘리스 섬’이 있다면 서부에는 ‘엔젤 섬’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 위치한 이 섬은 동부의 엘리스 섬과는 달리 아시아계 이주민들의 피맺힌 한이 남아있는 곳이다.

지금은 주립공원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지만 이 섬의 과거는 지난날 동양인들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험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시안의 모습으로 미국에 처음 발을 들인 이들은 중국인들이었다.

골드러시와 함께 시작된 중국인들의 이주행렬은 첫해에는 천 명 규모에서 다음해에는 만 명 규모의 빠른 속도로 늘게 되지만 피부색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코 좋은 생활은 할 수가 없었다.

힘든 일이나 지저분한 일들은 모두 그들의 몫이었다.

그나마 제 값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 당하기 일쑤였는데 그 중에서도 대륙 횡단 철도 공사와 늪 지역 복개작업 등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열악한 작업 환경 등으로 악명 높았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경제는 불황을 맞이 하게 되고 중국 이주민들의 값싼 노동력은 이들을 시기하는 백인들로부터 더욱 심한 배척을 받게 된다.

이런 연유로 1882년 중국 이민자 제한법이 통과되고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 길은 사실상 완전히 막히게 된다.

하지만 기존 법에 의하여 예외가 적용되었는데 당시 이미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의 직계가족이 이에 해당했다.

서류나 기록들의 보관 환경이 지금과는 달리 많이 열악했던 터라 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알려진 바에 의하면 대부분이 이주를 위한 가짜 ‘페이퍼 차일드’들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수용 시설이 엔젤 아일랜드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민국이 이 섬을 선택한데는 이유가 있다.

육지로의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태평양으로부터 들어오고 나가는 강한 물살과 차가운 수온은 그 누구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주변의 알카트래즈 섬이 유명한 교도소가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준비단계에서부터 논쟁이 많았던 이 시설들은 1910년 운영되기 시작하여 1941년 화재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수많은 동양인 이민자들의 눈물과 한을 기록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입국하는 이주민들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비교적 소수였음) 같은 동양인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에서 건너오는 백인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엔젤 아일랜드의 수용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고 한다.

짧게는 수 주에서 길게는 2년까지도 감금되었는데 지금도 수용소 여러 곳의 벽에서 당시 수감자들의 참담함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시구들이 많이 발견 된다.

그 중에서 한 구절은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목조 건물에 갇혀 하루 또 하루가 지나가고 대체 나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지 주변에 행복해 하는 이 있는가 둘러 보지만 모두들 조용히 얼굴을 떨구고 있네. 걱정과 근심에 잠 못 이루고 이리 힘들 줄 알았다면 고향에서 논일이나 배울 것을~”

이와 함께 남아있는 다른 시구들 역시 대부분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거나 끼니만 때울 수 있어도 절대 고향을 떠나지 말 것을 권유하는 내용들이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어 신세계로 향했었건만 시작부터 차별이 심했었으니 그들의 이민초기 생활은 얼마나 힘이 들었었을까?

어디 이뿐 이었겠는가?

1871년 발생하여 수십 명(피해 규모가 많이 축소 되었을 것이라 추정됨)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LA중국인 학살 사건이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오레건주 학살사건 등은 이억 만리 타국 땅에서 억울하게 떠도는 영혼들을 수도 없이 만들었다.

지금도 가끔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집단 매몰된 체 발견 되고 있는 사실은 무법천지에서 중국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중국인 이민자를 차별하는 위 법안은 1941년이 되어 2차 대전에서 중국이 미국과 연합국이 되고서야 폐지된다.

하지만 이후로도 60년대가 되어 새로운 이민법에 의해 차별이 금해질 때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경우 전쟁기간 동안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개인의 성향이나 의지에 구분 없이 전원 수용소에 감금되어 인권을 유린 당하게 되는데 아마 이는 인디안 격리정책 후 유일한 대규모 집단격리 사태였을 것이다.

자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벌어진 이 상황은 미국이 아주 복잡한 다민족 다인종 국가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지난날 일제 강점기에 우리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일본인들의 인권까지 들먹일 생각은 없지만 비슷한 외모로 인종차별에 관해서 만큼은 꽤 많은 공통점들이 존재하기에 보다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

소수 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아시아계 이민자들,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괄시와 천대는 지금을 살고 있는 많은 후손들에게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비록 떠나온 고향나라는 달랐지만 서로에게 주고받은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끼니만 때울 수 있어도 고향을 떠나지 말 것을 권유하는 시 구절처럼 이 곳에 뿌리를 내린 많은 이민자들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아시안 계의 지분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미국을 향해 많은 이가 풍요로운 약속의 땅이라 부러워한다.

그래서인지 지난 200여년간 지구상 어느 국가보다도 운이 좋은 길을 걸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많이 남아있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생하는 곳 미국, 피부색이나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발생 할 수 있는 사회적 반목은 끊임없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이러한 사회갈등 해소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다문화를 겪고 있는 어떤 나라도 결코 번영된 앞날을 보장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9.10.25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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