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이다.
그는 버지니아의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상류사회의 예절과 몸가짐을 배웠다.
명예로운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훗날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미국의 독립을 가져온다.
전쟁 후에는 미 헌법 제정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하게 되고 선거인단의 투표결과 일방적인 지지를 통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는 취임식에서 “우리는 세상에 유례가 없는 전례를 만들고 있으며 이는 진정한 원칙 위에서만 완성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간 세계 역사 속에는 대통령제의 정부체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 그리고 가장 민주적인 체제의 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군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꽤나 화려했다. 어머니의 모진 반대가 있긴 하였지만 그의 결심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많은 전투를 통해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보이게 된다.
백악관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그의 무용담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프렌치-인디안 전투 중 그가 적지에서 탈출할 때 일이다.
타고 있던 말들이 총에 맞아 두 번씩이나 바꿔 타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안전지대에 도착하니 그의 코트자락에는 네 개의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고 한다.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백전의 노장임이었음을 알리는 듯한 일화라 할 수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갑부의 미망인과 결혼을 하면서 버지니아 최고의 부자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경제력은 그를 버지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만드는데 한몫을 했다.
1775년, 주 대표단의 자격으로 2차 대륙회의에 참석하게 되고 이곳에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선임이 된다.
그 후 영국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는 1781까지 6년 동안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뛰어난 판단력과 지휘력으로 미국연방을 어려움에서 구하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전쟁 후 많은 이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함과 동시에 그에게 지도자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 주기를 부탁하지만 이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헌법제정이 원활치 않게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컨벤션에 참석을 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의장직을 맡게 되고 또 그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다.
권리장전(Bill of Right)을 마지막으로 헌법제정 작업이 마무리되자 그의 업적을 높이 여긴 대통령 선거인단은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그를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리하여1789년 4월30일 뉴욕에서(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음)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통령직에 취임을 하게 된다.
당시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그를 대통령이 아닌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었다 한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것이 만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에서 비롯된 명분 즉 미국의 독립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여 극구 거절했다고 한다.
만약 이때 워싱턴이 미국의 왕을 수락했었다면 미국의 역사는 어찌 변하였을까? 아니, 미국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가 아주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어찌 보면 한 사람의 결단으로 세계사를 바꾼 몇 안 되는 사건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어쨌든 그의 결단으로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역사는 시작이 된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들에게나 쓰는 ‘전하’라는 호칭도 그대로 쓰였고 실제로 왕과 비슷한 예우를 갖추고 왕에 버금가는 행세를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워싱턴 이후의 대통령들에게도 한 동안 이어진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을 시기 미국 정계의 최대 관심사는 연방제의 수위를 놓고 벌어진 이념의 대립이었다.
주정부와 연방정부 누가 더 많은 힘을 갖느냐에 대한 갈등이었으며 이는 파워게임이 독립한 미국에서도 여지없이 싹트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갈등은 특별한 정당의 구성이 없는 상태에서 해밀턴이 이끄는 친연방주의자들과 제퍼슨이 이끄는 반연방주의자들에 의해 구분이 되었다.
서로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대립의 각을 세우면서 절친한 친구 사이는 물론 가족 내에서도 서로 뜻을 달리하는 이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훗날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분리와 ‘진보와 보수’라는 정당정치의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지 워싱턴’의 뛰어난 지도력은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균형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으며 지방과 중앙의 관계에 있어서도 힘과 설득을 잘 배합하는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런 정책들은 효과를 보며 다소 갈등의 골을 줄이는데 기여를 한다.
그의 지도력에 힘입어 신생국가 미국은 그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797년 두 번째 임기를 무사히 끝낸 그는 대통령직에 다시 남아주기를 부탁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1799년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도자로서의 모든 면모를 찾을 수가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려 했고 국가를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헌신했으며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옳은 길만을 선택했던 진정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바로 미국인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185센티가 넘는 큰 키에 호감 있는 외모로서 멀리서도 그의 모습은 유난히 돋보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하고 인물까지 출중했던 그였다.
지금도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대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그의 모습은 주변 어디에도 존재한다.
흔한 1달라 지폐의 초상이 바로 그이고 수많은 지역의 지명과 길 또는 유명한 다리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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