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758~1831)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2-17 16: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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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미국의 제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그는 그의 전임 3대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4대 제임스 메디슨과 같은 버지니아 출신이다.

부유하다기보다는 넉넉한 환경의 농장주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다고 한다.

16살이 되던 해, 당시 버지니아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지만 독립을 향한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기에 그는 학교를 중단하고 독립전쟁에 뛰어들고 만다.

전쟁에서 그의 활약은 매우 뛰어났다.

한번은 주 총독의 궁을 습격하여 탈취한 대량의 무기로 지역 민병대를 무장시키는가 하면 또 한 번은 대륙군에 합류한 전투에서 총상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활약상은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이란 그림에 가장 잘 묘사되어있다.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용감한 전사가 바로 제임스 먼로이다.

이로써 제임스 먼로는 초대 조지 위싱턴, 7대 앤듀루 잭슨, 34대 아이젠 하워등과 함께 전쟁영웅 출신의 대통령 반열에 올라 있다.

독립전쟁으로 청춘을 불사른 그는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고 학위 또한 영원히 취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독립전쟁 중 친분이 두터워진 토마스 제퍼슨의 가르침으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이때의 법학 공부로 훗날 변호사 활동도 잠시 하게 된다.

버지니아 지역회의에서 정치를 시작한 그는 두 번에 걸쳐 대륙회의 대표가 된다.

하지만 새로 구성된 하원진출에는 실패하게 되는데 그때 상대가 다름 아닌 제임스 메디슨 바로 그의 전임 대통령이다.

같은 지역 출신으로 경쟁을 했던 두 정치인은 이후 서로 돕게 되며 차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는데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정치 생리를 직접 실증하여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한다.

하원진출에는 실패한 그였지만 젊은 정치가로서 반연방주의자들과 연대를 하였고 곧 상원에 진출을 한다.

상원 진출 후에는 비교적 탄탄한 길을 걷게 되는데 프랑스와 영국에 공사로 파견되어 외교력을 키우고 주지사와 상원을 오가며 정치력을 키워 나간다.

그의 초창기 라이벌이었던 제임스 메디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한다.

이후 전쟁 장관직과 국무장관직을 반복해서 맡게 되는데 한동안은 국무장관과 전쟁장관을 함께 겸직했었다는 기록도 갖게 된다.

대통령 취임 전 그의 활동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첫째, ‘루이지아나 매입’ 건에 깊숙이 관련했다는 것이다.

거대한 미국건설의 전조를 알리게 되는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의 영토를 두 배 이상이나 넓히게 되는 큰 사건으로 이 거래의 성사를 위해 나폴레옹을 만난 대표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제임스 먼로였다.

둘째는 전쟁에 관한 활동이다. 반영친불의 반연방주의자였던 그는 캐나다를 공격하게 되는 영국과의 전쟁 그리고 인디언을 대상으로 한 적대적인 정책에(군사적 위협으로 일관 되었기에 전쟁으로 봐야 옳다: 필자의 생각)서 앞장을 서게 된다.

전쟁에서의 그의 역할이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였는지 아니면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앞의 두 전쟁은 역사 속에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어쨌든 그는 1817년,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에 이어 버지니아 출신의 민주공화당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는 반영친불 성향이었던 반연방주의자들의 계속되는 승리였으며 시대적 상황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진보성향의 승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개혁과 진보의 이미지로 시작한 정치 세력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에 의해서 구세대로 전락해가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부르짖고 공화정을 외치던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는 반연방과 친불을 외치는 민주공화당에 의해 그리고 그런 민주 공화당은 훗날 앤듀루 잭슨의 민주당에 의해 기세가 꺾이게 된다.

그런데 자유와 권리를 더욱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던(주의 자치주권을 더욱 중요시함) 개혁 진보세력의 모습들은 정권유지가 지속됨에 따라 차츰 연방의 중요성을 주창하며 보다 많은 규제들을 들고 나오게 되는데 이는 또다시 떠오르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출현과 또 다른 구세대의 전락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피할 수가 없는 운명이다.

선거에서 대중은 구태에 연연하기보다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더욱 쉽게 호감을 나타낸다.

그들에게서 보다 도전적이고 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인데, 이는 바꿔 말해서, 정권의 유지와 생성은 전임자의 비인기 부분을 최대한 공략함으로써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에 매우 취약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다시 제임스 먼로 얘기로 돌아와 그의 대통령 임기 중 눈에 띄는 사건을 몇 가지 살펴보자.

먼저 미국의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주제 ‘노예제도’ 그리고 그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미주리 협상’을 들 수 있다.

미국 연방에 준 주를 가입시키면서 발생한 이 역사적인 사건은 노예에 대한 인도주의보다 정치권의 권력 다툼이 보다 큰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농장산업으로 노예제도의 지속을 원했던 남부와 이를 야만적으로 보았던 북부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은 노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북부의 정치인들이 전략적으로 노예주(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주: 주로 남부의 주들이 이에 해당함)의 확산을 방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당시 연방정부의 세력 주도권은 각주의 인구에 비례하는 하원 대표들과 각 주에서 두 명씩 파견하는 상원의원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데 백인 남성인구(투표권자)가 월등히 많았던 북부에서는 노예제의 폐지(적어도 노예주의 확산 방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았다.

이에 위기의식을 갖게 된 남부에서 동등한 수의 노예주와 비노예주의 연방구성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결국 메인주를 비노예주 그리고 미주리를 노예주로 결정짓는 미주리 협상을 가져온다.

하지만 특별히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던 미주리에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져갔고 결국 남북전쟁의 불씨가 되고 만다.

이때 미주리 협상의 적법성을 두고 의회에서 벌어진 칼훈과 다니엘 웹스터의 논쟁과 미주리 노예 출신 드래드 스콧의 판결 과정은 너무나 유명해서 미국 중학교 이상의 역사 교과에 꼭 포함되는 필수 항목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유명한 사건은 바로 ‘먼로 독트린’이다.

이 사건은 루이지아나 매입과 함께 미국을 대국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남미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식민지를 잃은 스페인이 다시 식민지 건설에 눈을 돌리자 미국은 이를 견제하는 한편 유럽 세력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내용을 천명하게 되는데 결국 이 선언은 강한 미국의 전조를 예고 하며 전 세계를 향한 경고 메시지가 되었다.

그의 대통령직 수행은 비교적 성공적이라 볼 수 있다. ‘기분 좋은 시대(Era of Good Feelings)’ 라는 표어와 함께 파벌간의 화합을 이루려 했던 그의 노력은 정확히 성공했다고는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훗날 재선을 위한 선거에서 연방주의자들이 그에 맞설 후보를 내세우지 못했고 그는 거의 만장일치의 결과로 재선에 성공하게 되는데 연방주의자들은 이때부터 서서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임기를 마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딸이 있는 뉴욕으로 건너가 마지막까지 그곳에 거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년에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하는데 이로써 그는 제퍼슨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을 했으면서도 많은 재산을 잃고 가난한 여생을 보내는 정치인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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