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기간 : 1825-1829 / 1선 / 국민공화당
6대 대통령 존 퀸시 아담스, 그는 2대 대통령이었던 존 아담스의 아들이다.
메사츄세츠 에서 태어났으며 대륙회의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통해 미국의 독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게 된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의 상당기간을 유럽에서 보냈으며 자연스럽게 외교관의 자질 또한 갖추게 된다.
이는 이후 초대 워싱턴과 2대 아버지 아담스 정권에서 많은 외교 업적을 이뤄낼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주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거치면서 정치를 시작한다.
시작은 아버지를 따라 연방파와 함께 했지만 해밀턴과 그의 추종자들이 아버지 아담스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어감에 따라 차츰 중심에서 따돌림을 받게 된다.
게다가 여러 정책에서 연방파의 입장에 반대했던 것이 그의 입장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특히 제퍼슨의 봉쇄정책이 지역경제를 위협한다고 연방파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도 이에 반대하여 제퍼슨을 옹호하고 오히려 민주공화파들과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데 이런 부분들은 훗날 민주공화당의 메디슨 대통령이 당선된 후 그를 외교관에 임명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유럽에서 다시 돌아온 그는 다음 대통령인 먼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스페인 공사와 체결한 영토확정 조약은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이 평가받는 외교업적으로 남게 되고 세계 최강국 미국의 기틀을 다지는 ‘먼로 독트린’ 역시 그의 손에 의해 작성이 된다.
이로써 그는 대국 미국을 대외에 선포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1824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후보들이 난립했고 정당보다는 개인들의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연방파가 세력이 약해져 정당의 역할을 못하게 되자 후보 모두가 민주공화당임을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인데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던 관계로 그 결정을 하원으로 넘기게 되었고 앞선 투표에서 2위에 머물렀던 아담스는 결승투표에서 단 한 표의 차이로 1위였던 잭슨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는 평소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클래이가 결승투표에서 자신이 제외되자 자신의 지지세력을 아담스에게 몰아 주면서 발생한 결과였다.
이에 아담스는 대통령 취임후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부정한 거래’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정국을 뒤흔들게 된다.
또한 결승 투표결과에 단단히 화가 난 잭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후 아담스 행정부를 쥐고 흔들며 힘들게 만드는데 특히 국유재산 관리, 도로망 건설과 운하 등 사회간접 자본을 확충 하려던 아담스의 계획을 철저히 무산시킨다.
민주공화당은 이로써 분열을 맞고 다시 둘로 갈라져 아담스의 국민공화당과 잭슨의 민주당으로 모습을 바꾼다.
4년의 임기 동안 잭슨의 민주당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은 그는 대통령으로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도 못한 채 재선에 실패한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화려한 그의 인생은 이때가 비로소 시작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직 대통령 출신의 하원의원이 되어 잭슨의 민주당에 맞서며 야당 국민공화당의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그의 활동 중에서도 당시 최대쟁점이었던 노예제도에 관한 논쟁은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인데 이를 주도하며 노예해방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 바로 그를 역대 미국 대통령중 가장 특별한 인물로 평가 받게 하는 부분이다.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당시 갈등을 잠시 살펴보자.
아이러니 한 것은 노예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노예제도를 옹호한 쪽은 다름 아닌 민주당 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성향의 오늘날 이미지와 맞지 않았던 이같은 민주당의 포지션은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민주당의 이러한 입장은 남북전쟁 후에도 한동안 이어진다.
공업을 중심으로 했던 북부와 농업을 중심으로 했던 남부의 대립은 정치적으로 국민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이었다.
특히 적은 수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남부는 그 세력이 만만치가 않았으며 노예제도에 관해서 만큼은 절대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북부의 정치인들은 노예제도의 비인간적인 기본원칙을 주장하며 그 야만스러움에 공격을 가했다.
이에 반해 남부의 정치인들은 공업화된 북부의 도시빈민이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며 반박했는데 사실 당시 상당수의 북부 도시빈민들은 남부 노예들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타난 노예제도의 인권침해는 정당화 될 수 없었고 이를 법률화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아담스는 투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스가 하원에 재직시 이루어낸 업적 중 가장 눈부신 것은 누가 뭐래도 함구령(Gag Rule)의 폐지였을 것이다.
함구령은 잭슨이 취임하던 해인 1930년 채택된 법률로 연방의회에서 노예제도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던 법률이었다.
연방 차원에서 주의 노예제를 논하는 것이 주의 자주 독립권을 침해한다는 게 함구령의 기본 논리였지만 이는 인권을 기본으로 하는 헌법의 기본취지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함구령의 폐지를 위해 아담스는 8년에 걸친 긴 투쟁을 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공화당의 당론을 한결같이 이끌며 정당의 이미지를 개척했는데 바로 이때의 정당 이미지가 기틀이 되어 훗날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바로 오늘날 미국 공화당의 탄생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아담스, 그는 아버지와 더불어 재임을 못한 대통령으로서의 기록도 함께 한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후에 보여준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후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게 되는데 특히 대통령 단임제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들이 취임 후 갖게 되는 독선과 아집의 가능성에 대한 부분인데 존 퀸시 아담스의 사례가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는 대통령의 평가가 역사에 의해서 이뤄지며 대통령의 자리를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리라는 역사의 진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권력이라는 마술에 빠지지 않고 훗날의 평가를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며 국정에 임했을 때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거듭 날 수 있다는 진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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