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김유진 / / 기사승인 : 2010-01-13 14: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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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명색이 정치가문에 몸담은 여건 탓인지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던 선거 구호가 어린 나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그렇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2번 찍어 살 길 찾자’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면 암탉이 먼저 쫓아가냐, 수탉이 먼저 쫓아가냐. 등 원시적이긴 하지만 어릴 때 마주했던 선거구호가 지금껏 뇌리에 남아있는 것도 이런 나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선거구호의 백미로 꼽고 있는-71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이번에는 2번, 대중은 김대중’과 ‘잘 살아보세’ 등의 구호는 어린 나에게도 ‘산뜻한 이미지’를 느끼게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정치흐름에 동물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나의 특이체질(?)도 이같은 여건의 부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30여년에 걸쳐 연구한 한 역사학자의 ‘히틀러’ 평전이 국내에 번역본으로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원 저자인 이언 커쇼는 ‘히틀러’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히틀러의 어린 시절부터 자살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통해 역사적 사실은 물론 히틀러와 독일 대중의 심리까지 분석하는 열의를 보였는데 기존과는 다른 히틀러의 재해석이 주목을 받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듯싶다.

뛰어난 선동력, 절차를 뛰어넘는 직관력과 통찰력 등 히틀러를 당대의 지도자로 견인했던 요소들을 보면 여타 지도자들의 걸출한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히틀러의 경우 절묘한 시대적 타이밍과 인복의 뒷받침해주는 특별한 상황이 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기록된 자취는 어찌 그리 다를까 싶다. 누구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을 받는가 하면 누구는 역사를 유린한 패륜아로 낙인 찍혀 눈총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언 커쇼는 이 균열된 시각들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다.

그는 홀로코스트나 세계대전이 히틀러 개인의 의지나 마스터플랜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히틀러가 머리 텅 빈 꼭두각시라는 시각도 거부한다.

분명 히틀러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머리회전이 아주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발군의 말솜씨에 정치적 수완과 추진력도 뛰어났다.

자아도취와 병적인 우월감에 빠져 있었지만 나름의 완결된 세계관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 낙오자를 살려내고 일약 역사의 주무대로 끌어올린 것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하늘이 내린 선물’과 독일의 패전, 좌절한 혁명의 깊은 생채기였다.

커쇼는 히틀러라는 개인의 특성과 재능에도 주목하지만 그것을 발현케 한 사회적 배경에 더 주목한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민족 재생, 반유대주의 이념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지만 학살 등의 세부사항까지 히틀러가 일일이 지시했다고 보진 않는다.

그는 나치체제를 일사불란한 통합체로 보기보다는 나치당과 대기업, 관료, 경찰 등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엘리트집단들이 끊임없이 서로 견제하고 갈등하며 권력투쟁을 벌인 불안정한 체제로 본다.

히틀러의 권력 유지와 나치의 정책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비밀이 거기에 숨겨져 있었다.

정치국 등 정치기구를 유지하면서 나름의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던 스탈린 체제(막스 베버가 말한 ‘관료주의적 권위’)와는 달리 나치스는 모든게 히틀러 개인에 집중되는 구조(‘카리스마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바로 이것이 스탈린과의 전쟁에선 패전 요인이 된다) 따라서 내부 엘리트집단들은 서로 충성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정책을 히틀러에게 보고하거나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총통을 위하여’(Working towards the Fuhrer) 체제로 달려가게 된다.<언론에 소개된 ‘히틀러’ 서평 中>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국회의원이 되려면 최소한 논두렁 밭두렁 정기라도 타고 나야 한다는 얘기를 국회의원들이 서로 덕담처럼 주고받던 모습이 흔했다.

따지고 보면 ‘국회의원에 당선된 우리들은 최소한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의 우회적인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국회의원의 의식이 이 정도면 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지도자가 된 후 맨 처음 보이는 반응은 감격이라고 한다. 그 다음엔 헌신하겠다는 결의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지나친 선민의식으로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주범은 선민의식과 용비어천가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의 번뜩이는 영민함(?)을 추앙하는 용비어천가와 하늘의 점지를 받았다는 선민의식이 하나가 되어 (지도자를)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하무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과대망상 제조기.

이 정도에 이르면 감히 누구도 지도자의 영도력(!)에 토를 달 수 없게 되고 지도자는 더 이상 스스로를 검증할 수 없고 자정할 수도 없게 된다.

히틀러만 해도 처음부터 ‘전범’의 길을 가고자 의도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독일을 전세계의 ‘공적’으로 낙인찍히게 하고 독일국민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예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뭔가 잘 해보려는 그의 희망과 의욕은 결국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에 몰아넣는 것으로 종결됐다. 오만과 독선이 히틀러로 하여금 과대망상의 늪에 빠져들게 했고 돌이킬 수 없는 오류의 길을 걷게 한 것이다.

굳이 히틀러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더라도 그 영향력으로 인해 지도자의 과대망상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 마을의 둑이 무너지면 그 마을만 물바다가 되지만 큰 강이 범람하면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되는 것처럼 국가의 지도자가 자정 능력을 잃고 표류하게 되면 국가와 국민이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잘못된 선생을 하느니 멧돌을 목에 감고 물에 빠지는 게 낫다는 말씀이 있다.

잘못된 지도자는 ‘잘못된 선생’보다 10배, 100배에 달하는 문제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의 지나친 자신감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 보자. 그 폐해가 결코 적지 않다는 점에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의미를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잘해서 박수갈채가 받는 일이 많겠지만 ‘용비어천가’를 구분해내는 지도자의 혜안이 있어야 한다. 충언과 간언이 지도자에게 또는 역사에, 어떤 식으로 약이 되고 독이 되는지 분별하는 일 역시 스스로의 몫임을 깨달아야 한다.

언론을 비롯한 지도자의 주변인들도 진언의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될 일이다.

달콤한 태평성대만 노래하다가 역사의 심판대에 공범으로 서게 되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니었음을 안다면 말이다.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됐다.

예상한 대로 정치권이 벌집이라도 쑤신 듯 요동을 치고 있다.

수정안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첨예하게 맞물려 저마다의 주장을 쏟아내는 통에 나라 안이 온통 난리다.

정치권 충돌로 행여 국민들이 새우등 터지는 횡액에 휩쓸리게 되는 건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다.

.....분별력 있는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간절히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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