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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서울 구경을 온 것도 아니고 돈 벌러 왔다. 그리고 그녀는 사정 없이 돈을 벌었다.
강남에 아파트도 사고 커다란 금고도 샀다. 그 금고는 지금 역삼1동 주민센터 맞은 편에 자리 잡은 '가시리 원조집' 카운터 앞에 동상처럼 서있다.
그 금고는 한 때, 늘 수억원의 현금이 빼곡이 채워져 있었고, 식구 같은 단골 사장들에게는 눈물 겨운 급전을 쏴 주기도 했던 '화수분'이었다.
관세청 사거리 건설회관 옆 골목에서 '가시리'라는 첫 간판을 걸었던 19년 전, 그녀는 동짓달 땅끝 마을 바닷 바람 보다 더 싸늘한 강남바람 때문에 시린 하루하루를 보냈다. 35평 되는 식당 안이 비오는 날의 염전처럼 고요했고, 담배보다 더 쓴 맛은 강남 사람들의 건조한 눈빛에서 훅훅 끼쳐왔다.
"본래 밥은 내다 파는게 아니다! 나눠 먹는거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렸다.
아이들을 그 늙은 어미에게 맡기고 서울에 돈 벌러 온 그녀는, 텅 빈 식당에 앉아 눈물 깨나 흘렸다.
그녀는 땅 끝에서 나고 자랐다. 그 남쪽 땅 끝에서 이 곳 서울 강남까지 왔으니, 어차피 끝을 봐야 했다.
끝을 제대로 볼려면 시작이 남달라야 했다.
해남 배추 수만 포기를 김치 담아 판 적도 있는데 뭐가 두려운가?
서울 상계동에 '해남절임배추'를 최초로 상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해남배추 붐을 일으켜 강남에 아파트도 샀으니 기세도 등등했다.
"이까짓 강남이 얼매나 별거냐고? 배고프먼 밥 먹고 짜게 먹은 놈은 물 퍼 마시고 그렇게 사는거지."
그녀는 아침까지 펄펄뛰던 민어, 전어, 병어, 갈치, 고등어, 낙지, 문어를 실어 올리고 생굴, 벌교꼬막, 육사시미. 육낙무침, 산낙지 육회등을 조합해서 '가시리' 밥상을 차렸다.
그 중 당시 영광 동네에서만 별식으로 챙겨먹던 보리 굴비의 발굴은 그야말로 '가시리 밥상'의 화룡점정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고향 땅끝마을에서 자란 배추, 가지, 오이, 호박, 고구마순으로 고향의 맛을 낸 '가시리 밥상'은 어느새 남도 음식의 상징이 되었다.
"하이고~ 상다리 휘어지게 차리면 뭐 하냐고? 강남사람들은 한국 남도음식이 아니라 미국 남도음식을 좋아해요, 미국남부 캘리포니아 음식이런거요. 강남 사람은 얼씬도 안하겠구만."
입바른 소리 잘하는 강남 친구가 보다못해 부화를 지르는데, 하도 맞는 말이라 눈물만 찔끔났다.
정말로 그랬다. 4월에 오픈한 가시리는 하루매출 8만원을 찍기도 하며 그 끔찍한 여름을 견뎌냈다. 매일 공수해 온 펄펄뛰는 생선을 몇 트럭쯤 내다 버리며 그야말로 지옥같은 여름을 보내고, 기적같은 9월이 왔다.
9월의 기적을 예고하는 메세지가 개척교회 방언기도 터지듯 전라도 사투리로 터져 나왔다.
"워매워매 아! 이 맛이 멋이당가! 죽은 엄매 맛이고만, 어찌 그리 생겨갖고 이 맛을 내 분다요?"
곰삭은 전라도 사투리를 찰지게 엮을 줄 아는 남도 사람들이 가게에 들이닥치며 분위기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흠미,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같은 아줌씨, 거 솜씨 쫌 보소! 우리엄씨 맛을 제대로 내부네잉~ 아그덜아! 오늘 허리띠 풀고 먹어불자잉~"
남도한식당 '가시리'는, 그렇게 강남 한복판에 밥이 아닌 '고향'을 짓기 사작했다. 35펑이던 '가시리'는 순식간에 100평 넘게 확장이 됐다.
그리고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상을 차리며 그녀는 숨 죽여 울었다.
"밥지어 내다 파는 짓 해선 안 된다는 말을 그제사 알아 들었어요!
밥을 짓는게 아니라 '고향'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 뭔 말인지 알고는 눈물이... 눈물이..."
그 이후, 강남에 지어진 '남도의 고향 가시리'는 싸립문 밀고 들어서면 언제든 "욕봤네, 밥 먹세!" 라고 말하는 고향 이웃집이 되었고 또 남도 사람들의 서울 친구, 경상도 친구가 맘 터놓고 술잔을 붓는, 나름 술 맛, 밥 맛 나는 명소가 됐는데, 이건 가시리 만의 특별한 손맛과 간, 별난 기록이 주효했다. 물론 고항 해남에서 알싸한 바닷바람과 햇빛을 먹고자란 푸성귀들도 그녀의 야문 손끝에서 되살아나 놀라운 요리가 되곤했다. 그리고 위스키?
언제부터 인가, '가시리'는 웬만한 룸싸롱 보다 위스키 판매량이 높은 전국 1위의 한식당이 됐다.
당시, 정,재계는 물론, 문화계, 그리고 이외수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사회체육계'의 전국구 보스들까지도 단골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이블 인사차 들를 때마다 권하는 '소주 한 잔'을 피하기 위해 손복순 대표는 '소주를 마시면 즉시 토한다! 위스키라면 몰라도...'라는 말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급기야 '위스키를 사다 달라!'는 요구로 이어졌고, 곧 '가시리 위스키 사태'가 급물살을 타게됐다.
"사실대로 말한 것 뿐인데... 위스키를 무조건 사오라는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위스키를 팔기 시작했지요."
그 후로 '룸싸롱보다 위스키를 더 많이 파는 한식당'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가시리'에서는 실제 하루 수십 병의 위스키를 팔았다.
보리굴비를 안주로 위스키를 마시는 게 소위 ' 강남가시리스타일'이었다.
당시 단골 이었던 사람들은 말했다.
"너무 이상했지요. 한식당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보리굴비를 먹고 산낙지를 먹는 분위기가 너무 황당했는데 거기선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저도 위스키를 시켰어요. 그 때 그 자리에선 그게 자연럽게 느껴졌어요."
고항 맛이든 위스키 탓이든, 남도 식당 가시리는 "일매출 4000만원 대를 오르내린다"는 소문이 나며 유명한 한식당으로 자리잡았고 방송, 신문잡지는 손복순 대표의 천부적 요리감각을 앞다퉈 소개했다.
체인점을 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전국에서 '가시리' 간판을 걸겠다고 사람들이 밀려드는데, 어휴. 그거 말리느라 혼쭐이 났어요. 가시리 간판만 걸면 돈이 굴러 들어오는 줄 알고 가게로, 집으로 쳐들어 오는데... 도망을 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가시리 주방에서 시험 아닌 시험을 보고 일정 시간을 견디고 진짜 간을 아는, 될 사람만 간판을 걸어 주었어요. 그러다보니 순식간에 가시리 20호점을 훌쩍 넘기고, 물류 차량에, 김치 공장에, 일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났어요. 돈은 쌓였지만 간이 붓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사고가 났습니다."
2002년 개업 후 2008년까지, 기적 같이 수직 상승을 해 온 '가시리' 손대표는 청담동 유명인사가 됐고 소위 강남의 큰 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손복순 대표는 판을 키웠다.
동생들을 '가시리'에 포진시키고 용인 보라동에 실평수 600평의 오리 전문점을 오픈했다. 그리고 즉시 도산했다.
"AI"는 날개 달린 것들을 도륙하면서, '가시리'로 날개를 단 그녀마저도 추락시켰다.
수십 억을 단숨에 날렸고, 체인점 '가시리'도 날개가 꺾이게 됐다.
"문제라면 내가 아직 덜 늙은 게 좀 문제였지요..."
그리고 와신상담!
그야말로 장작더미에 누운것보 더 아픈 밤과 쓸개보다 더 쓴 세월이 11 년 지난 지금, 역삼로 7길 17 번지 (역삼 1동 주민센터 맞은편)에 다시 자리잡은 "원조가시리점" 에서 3년동안 워밍엎을 마치고 이제, 점핑준비를 하고있다. 아직은 비밀이다.
그녀의 독백처럼 손복순은 "아직도 덜 늙었다!"
그래서?
'원조 가시리'의 신화를 다시 꿈꾸는 걸까?"
"이 나이에 무슨, 새삼 신화가 필요하겠어요? 땅끝 마을에서 와서 강남에 시원하게 깃발도 꽂아봤고, 애기들도 어른이 됐는데. 다만 지금도 고향 싸립문 밀고 들어오듯 불쑥불쑥 찾아와서 "아따 배고프고 술고프고 죽것소잉, 후딱 좀!" 하는 사람들한테 밥상 차리는 재미가 있어요. 나름 세상 속도에 맞는 계획도 있고...''
'가시리밥상' 말고 무언가 "한 칼"있다는 뜻이다. 남들 안하는짓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는 남들이 감히 못하는 일을 저지르며 살아온 그녀다.
''지금도 옛날처럼 위스키 시키는 사람은 없는가?'' 물었다.
그야 말로 '파안대소' 다.
"푸하하하! 위스키야? 나가 위스키 사올랑게 옛날 '강남가시리 스딸'로 한번 찌끄러 볼랑가잉! 오이 , 오선상 한 번 해불텨?"
얌전한 서울말로 대화를 하던 손복순 대표가 갑자기 폭포수처럼 개운하게 사투리를 쏟아내며 눈물 겹게 웃는다.
"나가 꿈이 있는 사람이라고! 일찌기 해남배추도 나가 뿌렸고, 요새 지천에 깔린 보리굴비도 나가 강남에 깔았제. 인자 조까 우아허게 '가시리트렌드'로 깜딱 놀라게 해 불텨. 기어이 해부러야제...이준석이가 당대표가 되는 세상인디 나도 깜짝 놀랄 일을 할 때가 되얐어!"하며 소줏잔을 호기롭게 턴다. 요새는 굳이 위스키가 아니어도 술이 팍팍 잘 넘어가는 갑다.
그녀에겐 꿈이 있었다.
땅끝 마을 그 바닷가 끝에서 혼자말로 되뇌이던 꿈. 가장 괴롭고 외로울 때 ,너무 일찍 곁을 떠난 아버지에게만 했던 말을 생각했다.
"땅끝마을 사람들은 한 번 뱉은 약속을 꼭 지킨다!" 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버지에게 "아부지 여그가 땅끝 아녀요. 땅끝은 쩌그 있고 여그는 바다 끝이여라, 이 땅은 시작이어요. 나가 땅끝까지 가서 돈 많이 벌어 큰 배 띄워 줄팅게 쫌만 견디시요. "
아버지는 그 약속을 너무 일찍 배반했지만, 그녀는 바다 끝에 심어 놓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견디며 살았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녀의 약속이 꼭 지켜질 것이다.
그녀는 땅끝마을이 아니라 바다의 끝, "땅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곳이 해남" 이라고 믿는 최초의 사람, 해남사람 기질대로 약속을 "뱉으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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