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우의 인물채집] "봉키호테" 박봉화 대표 편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2-06-24 13: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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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Never a problem 봉키호테!

콜럼부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아인쉬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고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었다.

박봉화는 자기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너무도 진지한 표정이라 웃지도 못했다. 지천명 이라는 나이 50을 넘은 이 사내는 대한민국 무역업자다.

그야말로 하늘의 뜻을 알 정도의 나이를 먹은 사내가 콜럼부스를 경쟁사 사장 처럼 알고 아인쉬타인을 구매처 사장정도로 알며, 나폴레옹을 운좋았던 싸음꾼 정도로 치부하는 그는 "봉키호테"로 불린다.

"나를 그렇게 부르는건 옳지 않아요. 내가 남들  안하는 짓들을 하지만 나는 실적이 없는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그랬다. 그는 아무도 한적 없는 일을 골라서 했고 그때마다 깜짝놀랄 실적을 냈다.


30년전, 전국의 돼지 도축장에서는  매일 쌓이는 폐기물쓰레기들을 폐기물처리  회사에 적지않은 용역비용을 지불하며 처리하고 있었다.

그때, 봉키호테 박봉화대표는 " 그  쓰레기들?"  을 돈주고 사겠다."고 말했다. 그 폐기물들은 주로 돼지의 내장과 껍데기였다.


그 날부터 전국의 돼지 도축장에는 쓰레기차가 아니라 컨테이너박스를 실은 트레일러가 줄을 섰다.


곱게 포장된 돼지간, 염통,등 내장과 돼지껍데기들이 컨테이너에 실리고 그것들은 즉시 달러가 되어 통장에 꽂혔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기적의 사나이라 불렀다. 쓰레기로 치워지던 것들을 싣고나가 빠빳한 달러로 바꾸어 오는 그에게 "봉키호테"라  부르기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한달에 50컨테이너를 실어 날랐으니 달러를 꽤 많이 벌었지요. 구제역이 터지기 전까지는..."

필리핀에 돼지 껍데기와 간 염통들을 50컨테이너씩 실어날랐던 그는 한동안 마닐라에서 밤의황제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구매 파트너들은 실제로 황제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과의 술자리는 날마다 "신나는 달밤" 이었다.


필리핀에서 우리의 새우깡보다 훨씬 많이 팔리는 스낵(돼지껍데기를 튀겨 만든다)을 독점공급하는 그들은 한동안 "봉키호테" 덕분에 고소하고 짭잘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전쟁만큼 끔찍한 구제역 통보!


즉시 물동량이 차단되고 한국의 도축장에는 수출품이 아닌 도축쓰례기가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전세계가 골고루 코로나 난리를 겪었지만 그 시절에 닥친 구제역 쇼크는 돼지와 관련된 것만 하는 그에게 특히 참담했다.


돼지농장을 운영하다가 IMF쇼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돼지는 아무도 사주지 않는데 수입품인 사료값은 끝없이 오르고 돈 구하러 다니다 빈털터리로 밤늦게 농장으로 돌아 왔는데 ,하루종일 굶은 돼지들이 질러대는 비명에 산이 밤새 울었습니다. 잠을 잘 수도 없어서 울다가 돼지들을 포기하고 보따리를 쌌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돼지들을 뒤로하고 양돈장에서 도망쳐 나오던  그때,  그 순간들이 다시 떠올라 술을 마셨다.

IMF보다 더 크고 깊은강 "구제역"을 만난 "봉키호테"는 쓰러졌다.


그리고 "구제역"이라는 깊은 강을 만난 그는 익사하듯 침잠했다.


2011년, 가을,  마닐라의 병원에서 깨어난 그에게 의사는 말했다.


"노 프라브럼!" 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심각한 "빅 프라브럼" 이었다.


뇌출혈로 인해 왼쪽 반신이 통제 불능 상태였다.


의사들은 "노 프라브럼" 만 바라보고 일 한다는걸 처음 알았다. "차라리 죽는게 나은거 아닌가?"생각하며 견디는 동안에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마닐라에서 아이들은 쑥쑥 잘 크고, 약속한듯, 한낮의 스콜도 시원스레 쏟아지곤 했다.


달라진건 오직 "봉키호테" 자신 뿐이었다.

"문득, 내게 무엇이 얼만큼 달라진걸까? 의문이 들었어요. 찬찬히 나를 바라 보았더니 의사들이 말하던 "노 프라브럼!"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혼자 일어설 수 있었고 걸을 수도 있고 자동차를 탈 수도 있고 비행기도 탈 수가 있었어요. 물론 옛날처럼 뛸 수는 없었지만 일찍
가면 뛰어다닐 때처럼 약속을 지킬 수 있었구요. 물론, 옛날보다 부지런 해졌지요"

수출을 해야겠다고 맘 먹었을때, 영어 한마디 못했던 그가그 장애를 극복했던 방법이 떠올랐다.


"비디오테잎을 사서 영화의 대사 전체를 외울때 까지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났어요. 나중엔 테입이 늘어나서 못쓰게 되니까 입에서 영어대사가 나오더라구요. 어차피 될때까지 할거였으니까 "노 프라브럼!" 이었지요"

옛날의 "봉키호테" 보다 훨씬 부지런해진 그는 남의차를 타다가 스스로 운전하는 차를 타게됐고 한 손으로 골프를 치기도 했다. 답답했지만 조급해 하지 않았다. 어차피 될 때까지 할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어렵게   길을 찾았다. "봉키호테루트!" 


구제역 국가 끼리의 교역통로를 찾아 또다시 "봉키호테"루트를 열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늘 컨테이너  박스를 실은 트레일러가 나타난다.


그가 운전하는 차를타고 예전 거래처에 동행했다.

그의 팬이된 글로벌파트너들이 다시 모여 그에게 "봉키호테!"를 외치며 말했다. "노 프라브럼!"이라고 

전남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양돈장에 찾아가 "오늘부터 돼지똥을 치우겠다!" 고 담담히 말했던 "봉키호테" 가 다시 돌아와 말했다.

Never, Never a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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