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진술 신빙성 못갖춰"
[시민일보 = 박준우 기자] 20년이 넘은 장기 미제 사건인 '제주 변호사 피살사건' 공범에 살인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12일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은 김모(57)씨에게 징역 1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같은 판단을 한 데 대해 대법원은 "피고인(김씨)의 제보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증거가 '피고인 본인 진술'이라는 간접증거만 있는 상황에서 진술의 주요 부분과 맞지 않는 객관적 사정이 드러난 경우 섣불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히 했다.
당시 조폭 생활을 하던 김씨는 1999년 8~9월께 누군가로부터 A변호사를 손 봐달라는 지시를 받고 조직 동료였던 손 모씨와 함께 A씨를 살해하기로 공모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를 손 봐달라는 지시와 함께 3000만원을 건네받은 김씨는 손씨와 함께 A 변호사의 동선 및 생활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미행했다.
약 2달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같은해 11월5일 오전 손씨는 흉기로 A 변호사의 가슴과 복부를 세 차례 찔렀다.
이후 A 변호사는 사망했고, 김씨와 손씨 두 사람 모두 검거되지 않으면서 해당 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 같던 사건은 사건 발생 21년 만인 2020년 김씨가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자신이 1999년 손씨를 시켜 살인을 저질렀다고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손씨는 2014년 이미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살인죄 공소시효(당시 15년)가 지났다고 생각해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해외 체류 때문에 시효가 정지됨에 따라 처벌이 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김씨는 곧바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김씨가 범행을 직접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공모공동정범' 법리를 적용해 살인죄를 물어야 한다고 봤다.
1심에서 무죄 판정이 나왔지만 이어진 2심에서는 유죄로 판단했다.
2심은 김씨가 손씨와 함께 범행을 모의 및 실행하는 과정에서 범행에 본질적으로 기여했고, '기능적 행위 지배'를 통해 범행 실행 행위 등을 분담했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A 변호사를 혼내주라'고 최초 지시했다는 폭력조직 두목은 당시 수감 중이었으며, 살인을 직접 실행한 손씨를 어떤 방법으로 도피시켰는지에 관한 진술은 모순되거나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손씨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범죄 실현의 전 과정에서 김씨와 손씨의 지위, 역할 등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김씨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2심처럼 김씨 진술에 신빙성을 부여하더라도 당시 범행 현장 상황 등 정황 증거만으로 김씨와 손씨의 살ㅇ니 고의나 공모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피고인의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추었는지에 관해 더 신중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했다"며 "간접증거만으로 살인의 고의와 공동정범을 인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 유사한 사안에서의 하급심에 지침을 주는 사례"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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