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5-21 18: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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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4) 銃대 멘 젊은 ‘괸당'들

글자 그대로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다. 대명천지 벌건 대낮인데도, 백귀(百鬼)가 덤벙거리는 깊은 밤의 공동묘지를 떠올릴 만큼 으스스한 분위기다. 고정관과 조용석은 2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순간, 기절초풍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눈앞이 어찔어찔해서 36계 줄행랑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에 옴쭉달짝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일본군대였지만, 학병출신인데다 일국의 웅변왕 자리를 누려온 사내대장부인데, 정체불명의 시체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얼어붙은 대서야 체면이 설 수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헛기침을 하고, 흩어졌던 기(氣)를 모아 후들거리는 아랫도리를 굳건하게 고정시켰다.

그러자 마치 ‘검시관’이나 ‘법의학 전문의’라도 된 것처럼, 자신감을 갖고 시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첫눈에 죽은 두 남녀는 남편과 아내라는 정식부부로 볼 수는 없고, 은밀히 불륜(不倫)관계를 맺어온 그렇고 그런, 허랑 방탕한 사람들임을 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선을 집어타고 내빼려다 한발 늦어 범인에게 붙잡혀 갖고 반항 한번 못해본채 비참한 종말을 맞은 것이라고 생각되자, 고정관과 조용석은 다시 한번 등골이 오싹하고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범인은 잔인한 방법으로 두 남녀를 때려죽인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선지 죄없는 한 척의 어선까지 공범으로 몰아 만신창이-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도록 우지끈 뚝딱 박살이 날 정도로 때려부수고 말았으니, 단말마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겠느냐를 미루어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바다는 비교적 잔잔한 편이었지만 쏴아쏴아 소리를 내며 혓바닥으로 핥듯 끊임없이 시체의 근처까지 밀려왔다 밀려가곤 하는 ‘파도의 유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엔 파도가 보이지 않았고, 귀에서는 파도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귀와 눈에 이상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 파도가 보이지 않은 것은 시체의 둘레를 2중3중으로 물샐틈없이 에워싼 관객들 탓이었고,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관객들이 헐떡거리며 내뿜는 숨소리와 꿀꺽꿀꺽 넘어가는 군침소리가 얽히고 설키면서 폭포소리처럼, 먹먹하게 귓전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살인현장 아닌 야외 가설극장? 관객들은 자석에 달라붙은 쇠붙이 모양 미동도 하지 않고, 인간 도살장이나 다름없는 살인현장을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고정관과 조용석은 사체에서 눈을 떼고, 관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 한차례 관찰을 해보았다.

1백여명을 헤아리는 40∼50대의 남녀관객들-그들의 시선은 2구의 사체에, 그 중에서도 배꼽 밑에다 초점을 맞춰지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것, 여자는 남자의 것을 ‘포르노그라피’에 흠뻑 탐닉한 듯 광기어린 눈으로 그림 감상들을 하고 있지 않는가?

다행히 둘 다 헝겊으로 그곳만을 가려 놓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선착순으로 ‘금테두른 특제물’ 만져보겠다고, 대가리 터지는 쟁탈전이 벌어졌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조물주의 걸작품-죽은자의 소유물이긴 해도 눈요기 감으로는 최고로 값나가는 귀중품이라는 사실을, 고정관과 조용석은 머리에 털이 난이래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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