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6-01 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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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1) 銃대 멘 젊은 ‘괸당'들

“자네는 ‘영재의숙’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월반으로 졸업했고, 갑종(甲種)중학교(오늘의 중·고교)과정도 2번 월반해서 5년제를 3년에 마쳤다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전문학교는 인문계 아닌 고등공업(전문학교 과정, 오늘의 工高와 다름)을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 책장에 꽂힌 책들은 딴판이 아닌가. 정치학·사회학·교육학·심리학·문학·신문학까지…공과계통은 가뭄에 콩나기 격이고 말야!”

고정관은 공산주의 관계서적은 왜 없는지? 실망이 컸으나 물어볼 수 없어 딴전을 피웠다.

“말씀드릴께요. 인문계 중등학교를 얼렁뚱땅 졸업하고, 고등공업(전문학교)쪽을 선택한 것은 자의(自意)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작전인 셈이었지요. 학병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아버지가 집요하게 타이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제부터 적성을 살려서 공부다운 공부해볼까 해요”

“그럼 말일세, 책장의 책들을 보아하니 정치학, 사회학 심지어 심리학까지 눈길을 끄는데, 어느 분야가 적성인지 그게 좀 궁금하군, 그래 앞으로 어느 계통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나? 그리고 경제학은 한 권도 없으니 어떻게 된 게야?”

조용석의 질문은 우회적이었다. 핵심은 ‘資本論’이었지만, 정면으로 들이대기가 서먹거려해서 내키지도 않는 적성론을 들먹인 셈이었다.

“저는 수학이 어렵거든요. 경제학은 수학보다도 더 어려워서…”

이 때 술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만성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고정관·조용석의 눈길은 술상위로 쏠렸다.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푸짐하게 차린 진수성찬-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달걀, 옥돔구이, 전복, 소라, 해삼, 자리회 등등 군침 도는 일품요리들이 아닌가.

“아니, 어떻게 이런 진수성찬을…? 이거 너무 폐를 끼치게 되었잖아”

“한섬마을에서도 먹어보기 힘든, 값진 해물들을…”

두 사람은 지나친 환대에 넋을 잃고, 침 먹은 지네 꼴이 되어 말을 더듬거렸다. 세사람은 술잔을 돌려가면서 쉴새없이 얘기를 주고받곤 했다.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도 있었지만, 괴로운 일들이 더 많았지, 너나 할 것 없이 조선사람 모두가…. 친일파·민족반역자의 경우는 다르지만 말야.

아우들이나 이 고정관이나 조국아닌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몸과 마음과 목숨까지 바쳤었잖아, 물론 전쟁터에서 또는 공장이나 관상에서 징용으로 끌려가 중노동하던 많은 동포들도 희생되었고 말야. 살아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을 생각하면 아우들이나 나는 행운아 중의 행운아임엔 틀림없지만…”

고정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떠듬떠듬 열변을 토했다.

“지나간 일 말로 하자면 무궁무진 끝이 안날텐데요 뭐, 아픈 상처 건드려서 좋을 게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지난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조국과 겨레를 위해 이제부터 보람된 일 해야지 안겠습니까? 우리들 앞에 때가 왔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런 뜻에서 오늘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이나 마시자구요. 자, 이잔 받으십시오!”

이만성은 어영부영 씨부렁거리고 나서, 빈 잔을 고정관의 코앞으로 쓱 내밀었다.

“고맙네, 그런데, 오늘은 아우님이 베풀어 준 환영파티인데 말야,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져서는 안되는, 말하자면 환송파티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자 그 말일세, 설마하니 세상이 종말을 고한다면 몰라도, 우리 ‘3인방’의 결속엔 이상이 없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네!”

고정관은 어지간이 취한 듯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3인방’을 들먹이며 호소하는 몸짓을 감추지 못했다.

“에잇, 형님두! 벌써 취하셨나요? 우리는 이제 3인방인데, 두 번 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겠지요, 굳게 결속하게 될 테니 맘 푹 놓으시라구요!”

“3인방…하하하. 이제부터 우리 3인방은 조국건설을 위해 아낌없이 젊음을 바쳐야겠지요. 저는 3천리 강산을 쩌렁쩌렁 울릴 두 형님의 웅변을 믿습니다. 벌써부터 3천리 금수강산을 뒤흔드는 두 형님의 사자후와 3천만 겨레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귀따갑게 들려오고 있단 말입니다.

두 형님의 분발과 건투와 행운을 빕니다”

이만성은 야망에 불타는 눈망울을 번득이면서, 두 사람을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고맙네만, 자네에겐 더 큰 ‘비장의 무기’가 있잖아?”

고정관이 부러운 눈으로 이만성을 바라보며 뼈있는 한 마디를 불쑥 내뱉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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