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곰곰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 수상쩍은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닙니다.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네요”
이만성은 한참 잘 나가다가 뜬금없이 아니 밑도 끝도 없이, 수상쩍은 구석이니 배신감이니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배신감이라니…뭘 어쨌기에…?”
이양국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공산당 지하운동으로 들어간 게 확실합니다. 포섭공작을 펴기 위해 찾아 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뭐야, 지하운동…? 그리고 포섭공작…?”
이양국은 어안이 벙벙해서 차분하게 되물을 수가 없었다. 섬뜩하게 들려주는 투박한 목소리였으니….
“‘비장의 무기’라는 말도 ‘3인방’(幇)이라는 말도 다 저를 자신들의 밑으로 끌어들여 도구로 써먹겠다는, 엉큼한 계산에서 나왔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섭이 너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좌익쪽으로 끌어드리면 3인방을 이룰 수 있고, 너를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자리돔 미끼로 너를 낚으려고 했다는 얘기냐?”
“네 바로 그겁니다. 저는 아직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그네들에게는 탐이 났었다 봅니다.
보잘 것 없는 문장력이지만, 그 사람들은 높게 평가를 한 셈이었겠지요. 큰 입(웅변)은 갖고 있어도, 좋은 원고(연설문)가 없다면 크게 울려터지는 확성기의 메아리도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우롱해도 되는 겁니까?”
이만성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게거품을 물고 분노를 터뜨렸다.
“어찌 보면 자존심 상할 일이긴 하다만,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오죽하면 천하의 웅변왕들이 자리돔 싣고 와서 환심사며 어쭙잖게 손을 내밀었겠냐? 불쾌하게만 생각하지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도량을 갖도록 해라. 한마디로 너는 시험대에 올라 있는 거라구.
그 사람들에게도 자존심이 없잖을 터인데, 아무에게나 ‘3인방’을 내세울 것 같으냐? 너를 어마어마한 존재로 인정해 주었다는 얘기라고, 이 아비는 판단되는구나!
앞으로 만나더라도 내색하지 말고,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네가 승리하는 방법이란 말야”
이양국은 아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네, 무슨 말씀이라는거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포섭공작 차원이었다는 그네들의 술수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 참에 언론계 진출의 뜻을 한층 더 굳히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는 경쟁상대에서 적과 적 사이가 되는 날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언론인이 되려면 언론에 대한 기본지식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버님께서 가끔 말씀해 주셨던 일본의 언론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일 곧 신문사에 취직할 것도 아닌데, 급히 서두를 건 뭐가 있다구? 그래, 조선땅에도 앞으로 정부가 수립되면 현재의 양대(兩大)신문 말고도 강력한 대신문들이 창간되어야겠지?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을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제 4부(府)가 말이다. 만약 강력한 제 4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3권은 썩고 병들고 그래서 제대로 된 국가를 든든하게 이끌어나갈 수 없을 테니까. 민중의 지지와 성원과 사랑을 받는 ‘민간정부’인 ‘동도일보’와 ‘조광일보’ 같은 대신문들이 나와야 하고….
물론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국 민주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어도, 나라의 제도와 사회의 구조가 그래서 그랬지 막강한 언론기관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게다.
‘제국대학’에서 관료를 양성했고, 명문사립대학에서는 언론인을 길러냈으니까. 사립대학 출신들은 제국대학 출신을 누르기 위해 언론계로 진출했던게야. 명논설위원-명주필은 ‘임금의 스승’인데, 고관대작들이라해도 언론인을 괄시할 수 없었던 건 당연지사였지”
신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이양국은 신문이라면 모르는 것 없다는 투로, 신나게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저는 곧 상경해서 신문사 문을 두드려봐야겠습니다.”
“좋다. 힘 닿는데까지 밀어주기로 하마!”
이양국은 매우 흐믓해 하면서 손을 내밀어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아량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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