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6-10 17: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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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7) 銃대 멘 젊은 ‘괸당'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양국이 입을 열었다.

“삼고초려? 하지만 삼고초려를 한다 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나 참 기가 막혀서… 세상이 바뀌다보니 별의별 희한한 일도 다 있더구나! 어제 낮 제주성내서 우연히 목격한 일인데 말이다. 그치들 노는꼴이 어찌나 가관이었던지…?”

입술을 떨며 비아냥거렸다. 눈빛도 차갑게 번쩍거렸고, 증오, 분노, 적개심 등등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네? 누, 누굽니까? 녀석들이란…”

이만성은 굳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는 목이 메인 듯 한동안 꾸물거리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게걸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외동에 살고 있는 최상균 형제 있잖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리는 놈들인데, 아마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대성통곡 했을 테지? 우리 제주땅에서 도움되는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죄 없는 사람들 괴롭히고 등쳐먹는 일만을 골라서 해온 천하의 악당들 아니겠냐?

공직자의 탈을 쓰고 부정과 수탈을 밥먹듯 해온 오리(汚吏)중의 오리들… 도매급으로 천벌을 받아야겠지. 그걸 알기 때문에 지푸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미군청청에 들락거리고 있었지 뭐냐. 과연 구명운동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인지, 예의 주시를 해야겠다.!”

이양국은 시종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달달달 몸을 떨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입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낯선 외국인의 불알을 붙잡으려고 개·돼지가 웃을 짓을 했겠습니까? 절대로 용서 못할 놈들… 한남 2리도 꽤나 시끄러워지겠군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제 버릇 개 못 주고, 구세주 찾아 헤매느라 눈에 쌍불을 켜서 발광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최상균 형제는 전형적인 아니 우두머리 원흉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제주성내서 구명운동을 벌이다니… 저것들을 그냥 우지끈 뚝딱…”

이만성은 눈을 부릅뜨고 금방 뛰쳐나가 작살을 낼 것처럼,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버럭 악을 썼다.

“흥분할 것 없다. 냉정해야 한다! 냉정하고 침착해야지 함정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녀석들의 술수에 말려들어선 안돼! 불쌍하게 되었지만, 무서운 놈들이야. 왜놈들의 충견(忠犬)노릇하며 쓸만한 우리 사람들을 모조리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잖냐? 피해자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게다.

하늘이 무심한 탓이었겠지만, 이제는 녀석들을 우리 집안에서 방치한다 해도 이를 갈며 때려잡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게다. 너는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관망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아비나 네가 상대하기에 존재가치로 보아 너무도 왜소한 족속이니까.

아무리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 해도 인내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부디 잊지 말아라”

“아버지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만, 그놈의 집안에 복수하기 위해 저는 11살때부터 이를 갈며 10여년을 하루와 같이 살아왔습니다. 놈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을 보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 자나깨나 칼을 갈았고 입신출세를 위해 한 우물 파는 데 열중해왔던 겁니다.

그놈의 집구석 폭삭 망하는 꼴보고 나서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넋두리를 해왔는데…. 시대가 안 바뀌었더라면 정말 스릴이 있어서 좋았을 것을! 하고, 요즘 와서 쓴웃음 짓기가 한두번이 아니었답니다.

남들이 처치해주면 다행이지만, 그냥 흐지부지 되었을 때엔 저로서는 막무가내로 손을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0여년 동안 토지를 못쓰게 만들고 농사를 망쳤고… 목숨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것을 당사자들도 알고 있을걸요!”

10여년 동안 물심양면으로 입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되돌아보며 골똘히 생각해 보자 슬픔이나 분노라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고, 남은 것이라고는 자조(自嘲)와 허탈감이 있을 뿐이었다.

“진정하도록 해라. 그럴 줄 알았더라면 성급하게 목격담을 꺼내지 않았을 텐데, 이 아비는 네 마음이 거기까지 갔을 줄을 몰랐었지 뭐냐”

이양국은 헛기침을 하고,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가다듬으며 흐뭇한 듯 히죽 웃었다.

그러나 이양국은, 자신을 독립운동(법정사항일투쟁의 대표자중 한사람)가의 아들이라 해서 온갖 박해를 가했고, 취직의 길을 봉쇄했던 적악(積惡)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들 앞에서 발설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만약 그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이만성은 꼬리에 불붙은 호랑이처럼 뛰쳐 나가 최씨를 겨냥해 추격을 감행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터였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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