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6-12 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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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2) 웅변왕, 그 공포의 입

겉봉에는 <高正寬-趙容奭 貴下>라는 두사람의 이름이 또박또박 정자로 번듯하게 씌어져 있었지만, 발신인의 이름은 없다.

고정관은 떨리는 손으로 알맹이를 끄집어냈다. 첫눈에 긴 내용의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2장의 편지지 누르스름한 빛깔의 마분지 같은 싸구려 편지지를 깨알같은 글씨로 촘촘히 메우고 있어서, 한차례 읽는 데에도 고역을 치러야 할 소름끼치는 편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뜸들이지 말고 어서 읽어보세요. 나 이거야 숨이 막혀서…. 고향에 와서 별 꼴을 다 보는군!”

조용석이 빼앗고 싶은 심정인 듯 손을 달싹거리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그치는 것이었다.

“차라리 확 빼앗을 일이지… 자네가 읽게! 자네몫으로 띄운 편지이기도 하니까”

고정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내동댕이치듯 편지를 조용석의 손아귀에 안겨주었다. 조용석은 얼씨구나 하고 편지를 확 낚아챘다.

<고정관-조용석에게 보내는 글. 만부득이한 사정으로 대면할 처지가 못 되어서, 글로썬 전언하게 된 이쪽 입장을 정중히 헤아려주기 바란다. 서로 만나고 보면 더없이 친근감을 갖게 될 낯익은 얼굴이지만,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음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충언도 입에 쓴 법인데, 여기서는 충고의 도를 넘어 경고의 성격을 띤, 말하자면 추상같은 경고문이고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는 점 명심해 주기 바란다.

한남마을이 낳은 두 사람은 제발 고향사람들의 기대와 촉망을 저버리지 말기를 전체 고향사람들의 이름으로,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다.

두 사람은 그 잘난 입하나 갖고 일약 웅변가로 벼락출세한 사실 익히 알고 있다. 고향에 돌아왔으면 겸손하고 어려워하고 미안해 할 줄도 알아야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휘젓고 설쳐댄다고 해서야 눈허리가 시어서, 좋게 보아줄 수 없지 않냐 이 말이다.

설마하니 죽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한 건 아니냐고 묻고싶다. 너희들이 언제부터 수사관행세 해 왔고, 언제부터 법의학자 구실 해왔는지? 그 대목도 묻고 싶다.

천인공노할 살인마에 의해 비참하게 죽은 房俊太씨 피살현장에 무엇을 얻겠다고 나타나서, 검시(檢屍)아닌 검시를 하며 법석을 떨었는지? 그 이유도 밝혀야 되지 않겠냐? 곁들여서 의문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방준태씨의 죽음이 곧 너희들 자신의 죽음이라는 사실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이 말은 房씨의 죽음이야말로 남의 죽음 아닌 너희들 자신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달미동 李陽國-李晩成 부자를 만나보았자 보탬이 될 것은 아나도 없었을 텐데…?

너희들 스스로 잘난 놈인양 착각하는 건 자유이지만,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깨닫는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겠느냐마는, 너희들은 열 번 죽었다깨어나도 깨닫지 못할 불쌍하기 짝없는 놈들이란 마리다.

그러나 개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고향을 떠나는 거다. 평화로운 고향 땅에 평지풍파 일으키지 말고, 제주땅을 떠나는 것만이 액운을 때우는 길임을 명심하라는 얘기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늦어도 9월말일 안으로 실천하도록! 만약 이 경고문을 비웃고 한쪽귀로 흘려버림으로써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은 너희들 스스로가 선택한 업보임을 각오하기 바란다. 1945년 9월 20일 가까이서 지켜보는 선배로부터>

“평화로운 이 땅에 소름끼치는 살인음모가 꿈틀거리고 있었다니…. 도대체 누구일까 주범이…?”

조용석이 소리내어 읽은 편지 내용을 포착하고, 고정관이 와들와들 떨며 꺼지는 듯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형님이나 저나 남에게 원한 살 짓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런 도전장을 보내다니!”

조용석도 몸을 떨며 한숨을 내쉬엇다.

“조직이 있어. 당당 뛰처나가자구!”

쫓기는 몸이 된 고정관은 벌겋게 달아로는 얼굴로 분노를 터뜨리며 자리를 박차고 뛰어 일어났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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