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7-19 18: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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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1) 7년 가꾼 순정의 꽃
강영범이 자신과 이만성이 만난 사실을 비밀에 붙여달라며 무릎꿇고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으니…. 이럴 때엔 과연 어떻게 처신을 해야 옳은 것인지? 이만성은 자못 난감하고 얼떨떨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한들, 일본 제 1의 명문대학출신으로서 긍지와 자존심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팽개칠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건 아무나 취할 수 있는 범상한 행동이 아니지 않는가?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멋있고 존경스런 사람이라는 느낌이 떠올랐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볼 때, 극비리에 추진했던 정치적 음모가 들통났을 경우 남을 탓하기에 앞서 속죄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이만성은 불가능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저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만 정치는 안하기로 결심이 되어 있습니다. 하고 싶더라도 정치적 생명이 이미 끝났기 때문이지요. 이형만 눈감아 주신다면 학계나 교육계쪽으로 나가보든지… 아마 그 방면이 될 것 같습니다”

강영범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강형의 진로문제에 대해 왈가왈부 얘기할 입장에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강형이 어떤 종류의 직업을 선택하건, 우리 두 사람은 숙명적으로 마주칠 기회가 많으리라는 사실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 교육계쪽이나 아니 그 보다는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꼭 이 자리에서 말씀드려두고 싶은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만나는 일 없어야겠다는 점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말할 것 었고, 경성에서도… 지금가지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강형도 솔직하게 생각하는 바를 말씀해 주시지요”

“동감입니다. 고맙습니다. 생명의 은인으로 영원히 맘속 깊이 간직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할 대목이…”

“네, 얘기해 보시지요. 뭡니까? 이형”

“다름이 아니고…한남마을을 다녀온 세 사람의 입들을 철통같이 틀어막아 주신다면…”

“염려놓으십시오. 그 점은…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난생 처음 만남이자 두 번 다시 못 볼 마지막 이별인 셈이었다.

고정관의 집에서 이만성은 비록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는 하더라도, 강영범과의 묵계(默契)를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하는 아픔이란 죽음인들 이보다 더하랴 싶으리 만큼 감당키 어려운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낌새를 채지 못한 네사람은 매우 믿음직스럽다며 호감어린 눈으로 이만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쥐구멍 찾고 싶어하는 이만성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선마을의 김순익군을 만났었지, 자네와 의논한 다음 결정하기로 하고, ‘관광면장 타도’에 관한 건을 거론했었는데…”

고정관이 서론을 꺼내고, 세불포에서 일어난 방준태 추격사건의 줄거리를 얘기해 주었다.

“아, 그런 일이 벌어졌었군요. 이번은 관광면장타도라! 저도 대찬성입니다. 형님들이 앞장서신다면 기꺼이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관광면장만을 타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주도내 각 읍-면에서 범도민운동으로 확산시켜나가야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만성은 앞서 김순익이 집으로 찾아왔었고, 그때 그런 얘기도 있었다며 말시의탄이 없지않다는 말과 곁들여서, 빠른 시일 안에 제주도를 발칵 뒤집어엎는 ‘면장타도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김대호 수석부위원장을 내세운다면 범도민운동은 열화와 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덧붙였다. 고정관과 조용석이 손뼉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그날밤 이만성은 자정이 가까운 깊은 밤에 그들과 헤어져서, 혼자 달미동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한남마을 동구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먼발치로 아득히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밤에 누구일까?

“선생님, 이만성 선생님!”

꾀꼬리소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 이만성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서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여자임엔 틀림없는데…?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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