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
1998년 8월 24일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이사장 자리로 가게 되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은 교통, 도로 분야를 비롯해 공원, 지하보도상가 등 다양한 서울시 시설물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는데 장묘 사업도 관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8월초 엄청난 폭우로 인해 서울시립 묘지안에 있는 350여 기의 묘지가 유실되고, 4,000여 기의 묘지가 파손되고 허물어지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헬리콥터로 피해 현장을 둘러 보셨던 고건시장님은 ‘이것은 제2의 삼풍 사고’라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너무도 처참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수해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시설관리 공단 이사장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마장동에 있는 공단 본사에서 용미리 묘지까지 매일 오가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공단 업무는 서울시에서 대부분 익힌 일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선 묘지에서 유실된 시신 350구를 계곡에서 찾아내어 방부처리 한 후 다시 관에 넣어 유족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시신은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나는 장묘사업소 인부 10여명과 그 지역 인부 10여 명에게 흰 가운을 입혀 유족들을 맞이하도록 했다. 그리고 유족들이 연고 시신을 확인하고 찾는데 있어서 언제나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로 안내하도록 했다. 하지만 참혹한 현장과 훼손된 시신을 접한 유족들은 격양되기 일쑤였다. 난 그럴수록 더 친절히 안내하도록 했다.
시신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대로 있다가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난 현장을 방문하신 한분 한분에게 설문서를 통해 제안을 했다. 모두 화장을 한 후 합동 분묘를 만들고 그곳에 위령비를 세워 고인의 이름을 새기는 게 어떨가 하는 내용이었다 . 처음에는 반대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나의 간곡한 설득에 대부분의 유족들께서 동의를 보내주었다.
유족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건 시장님은 보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셨지만 난 보상으로는 협상과 타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사실대로 친절하게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그래도 안 되면 시장님 말씀대로 보상 방법을 건의하겠다고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합동 화장부터 위령비 제막식까지 하나의 절차가 이루어질 때 마다 유족들에게 개별적으로 사실을 알리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예를 들면 화장 날짜, 위령비 모형, 위령비의 글 내용까지 하나하나 유족들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했던 것이다. 이것은 유족 분들의 집단적인 항의를 방지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일단 사람들이 모이면 각종 요구 조건을 걸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는 사실 이 일을 전임 공단 이사장에게 해결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나는 입장에서 계속 일을 맡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아 여러모로 난관을 겪기도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으로 가게 되었고, 시에서는 그동안 보여준 일처리에 새삼 놀라는 눈치였다.
마지막 위령비 제막식을 앞두고 난 공단 이사장 주관 하에 제막식을 치르겠다고 보고를 드렸다. 시장님께서 참석하신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혹 유족들과의 보상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막식에서 만난 유족들은 외려 나에게 ‘이사장님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셨죠!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위로의 말씀을 해주기도 했다.
월드컵유치가 결정된 후 서울시는 적절한 경기장 위치와 비용 부담 문제로 축구협회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경기장은 우여곡절 끝에 난지도 상암동으로 확정 되었고, 1,000억 원 내외가 들 것으로 예상된 건립비는 축구협회의 일부 보조를 받아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건립비 문제로 인해 월드컵 개회식을 인천문학경기장에서 하기로 하는 등 사업 추진 과정에서 어려운 문제도 많이 있었지만 결국 원안대로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 강덕기 시장직무대리님의 고뇌가 컸을 것이나 잘 마무리 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실 더 어려운 점은 ‘대회가 끝난 후 경기장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였다. 1988년 올림픽이 끝난 이후 잠실 주경기장의 엄청난 유지관리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서울시로서는 월드컵을 앞두고 그 이후까지 꼼꼼히 준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울시는 경기장 공사부터 경기 진행 그리고 이후 관리까지 전 과정의 업무를 민간 기업에게만 맡기지 말고 시설관리공단이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당시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이었던 난 이런 내용을 보자마자 언뜻 두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첫째는 세계적인 대회를 치루는 경기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우리 공단 직원들이 제대로 이 일을 담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월드컵이 끝난 후 경기장 운영에 있어서 과연 적자를 모면하고 흑자를 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우선 분야별로 기술직 직원들을 엄선하여 공사 현장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공사를 참여하는 직원들에게 일정한 양식을 주어 그날그날 일지를 쓰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사장에게 직접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내가 그 일지를 보고 기술적인 분야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일지를 쓰면서 기술자들 스스로가 업무 내용이 정리되고 기술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했다.
사후관리 역시 늘 고민의 대상이었다. ‘시설 관리를 통해 적자를 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흑자를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잠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4강 경기를 하는 날에 쇼핑매장에 대한 입찰을 실시했다. 예정가가 45억 원이었는데, 까르푸에서 무려 91억 원을 써냈다. 너무 놀라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전체적으로 계산해보니 경기장 운영비용을 제하고도 100억 원이 넘는 흑자였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에 유래 없는 결과였다. 세계 각국 공히 올림픽이나 월드컵 후 적자를 메우기 위해 골몰하는데 서울 상암경기장은 시작부터 흑자를 내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