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세 번째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미국 ‘독립선언문’의 원안 작성자로 유명한 그는 당시 보기 드문 진보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진보성향은 미국의 독립뿐 아니라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고의 인권국가로 자리매김 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 초기의 다른 위인들과 그를 구분해주는 중요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먼저 그의 일생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그 역시 당시 유명 정치인들과 마찬 가지로 부유한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은 그는 젊은 나이에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버지니아 대표로 1·2차 대륙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대중연설보다 글을 쓰는데 뛰어났던 그는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거의 혼자서 작성하게 되고 며칠 뒤 동 선언문이 채택되자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성공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이후 프랑스 공사, 국무장관, 부통령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무게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진보적인 그의 정치성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로 이 무렵 탄생한 미국 민주당의 전신 ‘민주공화당’ 역시 다름 아닌 제퍼슨의 작품이기도 하다.
1800년, 존 아담스와의 재대결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국 제3대 대통령에 취임을 하게 된다.
임기 중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아마도 ‘루이지아나 매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미국의 영토를 두 배 가까이 늘리게 된 역사적인 사건으로 서부 개척시대의 장을 비로소 열게 된다.
1809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그는 자신이 설립한 버지니아대에서 교육자로서의 인생을 살다 독립 50주년을 기념하는 1825년 7월4일에 83세로 생을 마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평생 친구이며 경쟁자였던 존 아담스가 같은날 운명을 달리한다.
그는 또 조지워싱턴, 루즈벨트, 링컨과 함께 네 명의 ‘큰 바위 얼굴’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연 무엇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고 있을까?
첫째, 그는 매우 박식했다고 한다. 정치인이라는 타이틀 말고도 건축가, 음악가, 교육자, 농학자, 발명가, 원예가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훗날 케네디 대통령의 말은 이런 사실을 더욱 뒷받침한다.
노벨상 수상자 49명을 백악관에 초대한 케네디는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에서 다양하고 훌륭한 분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매우 특별하다고 추켜세우며 아마 제퍼슨만이 그들의 다양함과 훌륭함을 동시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거라고 덧붙였다 한다.
이는 그의 이미지가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둘째, 그는 미국 진보주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신봉하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또 자유주의자였다.
이런 그의 성향은 그가 초안을 잡았던 독립선언문에도 잘 나와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머리말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것들은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 할 수 있는 권리이다)는 당시 왕정과 귀족계급에 의해 장악되었던 사회통념 속에서 그가 추구했던 사회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이런 정치성향은 초대대통령 조지워싱턴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던 연방주의자들과 대립하였고 이에 대해 연방주의자들은 그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천한 그의 신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연방주의자 해밀턴과 대립하여 국무장관을 그만두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진보적이었던 그의 성향은 제임스 메디슨(그의 뒤를 이어 4대 대통령에 선출됨)과 함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민주공화당이라는 정당을 창설하게 되는데 당의 성격상 서민계급으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얻게 되고 이후 20여년 동안 미국의 정계를 주도해 나간다.
그리고 오늘날의 민주당으로 이어지며 진보와 개혁이란 이미지로 복지와 후생을 우선하는 정책기조를 유지하게 되는데 버락 오바마 정권의 의료보험 개혁 의지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지금의 광대한 미국을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의 대통령 임기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다름 아닌 ‘루이지아나 매입’이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확장시켰음은 물론이요 서부개척의 발판이 되어 훗날 미국이 대륙 서해안까지 진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원래 미시시피강의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했던 루이지아나 매입은 전쟁으로 자금난에 허덕이던 나폴레옹으로부터 당시 프랑스 점령지역을 모두 매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뜻밖의 제의에서 비롯된다.
불모지로만 알려져 있던 이곳은 프랑스인들조차 그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떡이 통째로 굴러들어온 격이 아닐 수 없다.
광대한 넓이의 미국 중부 12개주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고 이후 미국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영토 확장에 크게 성공한 제퍼슨의 연방정부는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 속에서 장기집권을 예고하게 되고 이로부터 향후 20년 동안 정권을 유지하게 된다.
이토록 국민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였지만 그에게도 몇 가지 의혹들이 존재한다.
그의 사생활에 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흑인노예와의 관계는 너무나 잘 알려진 스캔들이다.
부인을 일찍 여윈 그는 재혼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노예로 데리고 있던 여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식까지 두게 되는데 사실여부에 대한 논쟁이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문 속에 흑인노예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포함하려 했던 그가 수백명에 이르는 노예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부적절한 관계까지 가졌을 거라는 주장은 그의 좋은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제한된 신분의 노예 여인과의 관계는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정당화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그는 끝까지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고 소유했는데 이것은 그가 추구했던 인간 존엄의 이상과도 맞지가않는다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와 더불어 그의 정치 활동 중에서 오점을 찾는다면 인디언정책을 들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향한 그의 정책이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파괴하는 사악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통해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포기하고 백인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랐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백년간 유지해온 그들의 관습과 문화를 하루아침에 바꾸려던 생각이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화의 동화가 아니면 강제이주 시키겠다는 그의 정책은 강제 이주 쪽으로 방향이 잡히게 됐고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인간대학살은 이렇게 시작된다.
미국 최고의 인물이었던 ‘토마스 제퍼슨’, 그의 삶과 이상은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인권 옹호가 제퍼슨 역시 완벽하지는 못했다.
그가 남긴 몇 가지 찜찜한 기록들,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 기록들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고민을 해본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지금도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어디에 있는지?
혹 찾아줄 현자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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