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9)-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해리슨’(1773~1841)

김유진 / / 기사승인 : 2010-01-17 12: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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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재임기간: 1841-1841 / 단임 / 휘그당.

1841년 3월4일,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던 워싱턴은 추운 날씨에 비까지 많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이 취임하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익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겉옷을 벗어 젖히고 모자도 쓰지 않은 체 준비해온 연설문을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선거기간 내내 ‘Granny Harrison(할아버지 해리슨)’이라는 놀림과 공격을 받아왔던 탓인지 아주 작심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아무리 인디안 토벌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전쟁 영웅이라 하여도 그의 나이는 이미 70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많은 나이는 민주당의 주요 공략 포인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리슨은 취임식을 근사하게 치름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취임연설은 모두 8444 단어라는 기록적인 분량이었다.

읽는 데만 2시간 가까이 걸렸다는 이 연설문은 그의 참모 ‘다니엘 웹스터’가 일차 보정을 한 뒤의 양이었다고 하니 그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연설이 끝난 뒤 그는 가두 행진까지 빠짐없이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달 뒤인 4월4일 오전 12시40분 감기로 인한 합병증 증세를 보이며 사망하게 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의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만다.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자.

버지니아의 부유한 집안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유수한 교육기관들을 거쳐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학교를 포기한 그는 군입대를 결심한다.

초급장교 해리슨은 지금의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아나주 등이 있는 노스웨스턴 테리토리에 파견되어 인디안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미친 앤소니’라 불리는 웨인 장군의 수하로 많은 전과를 올리게 된다. 약 7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민간으로 돌아온 해리슨은 미개척지나 다름 없던 노스웨스턴 지역에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인간관계가 좋았던 해리슨은 중요한 위치의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노스웨스턴 지역의회 대표에 선출된다.

이후 인디아나 준 주(주가 되기 전)의 임명 직 지사를 거치게 되고 연방 하원의원과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그리고 연방 상원의원에 자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특히 인디아나 준 주 지사시절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되는데 이날의 이미지는 훗날 대통령 후보로 나설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선거에서도 그가 부대를 직접 이끌고 전투에 나섰던 모습은 영웅적으로 묘사되었고 이는 강한 이미지로 많은 이들에게서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참가한 전투 중에서 가장 화려한 전과로 남는 전투를 꼽으라면 그것은 쇼니족의 테쿰서 추장과의 싸움일 것이다. 테쿰서 추장은 1812년의 영미전쟁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 정부에 맞서 싸운 인디안 연합군의 지도자로서 티페카노 전투에서 해리슨의 부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해리슨의 부대는 몇 배나 되는 병력과 화력으로 우세한 상황 속에서도 끈질긴 테쿰서 추장의 저항으로 애를 먹는데 결과는 역시 해리슨의 승리로 돌아가고 테쿰서 추장은 전장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해리슨을 뉴 올리언스 전투의 ‘앤드류 잭슨’과 함께 국민적인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영미전쟁 속에서 두 번째의 큰 승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은 전사한 테쿰서 추장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그가 내린 저주에 의해 해리슨이 죽었다고 보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죽기 전 테쿰서 추장은 미국을 향해 저주를 내렸고 이로 인해 미국은 20년에 한번씩 0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는 불행을 겪게 된다.

과연 그의 저주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저주의 진실은 알 수가 없지만 이미 7명의 대통령이 저주와 같은 내용으로 죽었으니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만도 아닌 듯싶다.

그것도 첫 번째 저주의 희생자가 다름아닌 해리슨이라니 좀 섬뜩해지지 않는가 말이다.

테쿰서의 저주에 해당하는 7명의 대통령들을 살펴보면 더 으스스하다.

1840년 당선된 해리슨 폐렴 사망, 1860년 당선된 링컨 암살 사망, 1880년 당선된 가필드 암살 사망, 1900년 재선된 매킨리 암살 사망, 1920년 당선된 하딩 심장마비 사망, 1940년 재선된 루즈벨트 뇌출혈 사망, 1960년 당선된 캐네디가 암살로 사망했다.

1980년 당선된 레이건 역시 암살 기도가 있었지만 무사했고 이후 조지 부시가 2000년에 당선되었지만 아직 살아있다.

이로 인해 테쿰서의 저주가 비로서야 끝난 것 같다고 안도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미국의 대통령들을 정리하면서 발견되는 새로운 사실들은 놀랄만한 일들이 꽤나 많다.

특히 인디언들에 관한 사실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데 미국의 형성과 함께한 인디언 대학살은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로 남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해리슨의 죽음은 지금도 논란이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죽음이 나쁜 날씨 속에서 폼 잡으려다가 생긴 병 때문이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 후자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감기가 아닐 것이라는 의문을 갖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건강에 이상을 보이기 시작한 게 취임식이 이미 3주도 더 지난 시기였다.

게다가 학계에서는 나쁜 날씨만으로는 호흡장애와 같은 증상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특히 폐렴과 황달 그리고 패혈증 증세는 미생물에 의한 병원체 감염을 주요 원인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병이 무리한 취임식이 아니라 병원균과의 접촉에서 비롯 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취임 후 그는 밀려드는 방문자들로 백악관을 점령당한 채 병원체에 노출되었고 마땅히 쉴 공간조차 찾지 못해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 역사상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던(첫 번째는 로널드 레이건) 해리슨 대통령은 이렇게 측은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음모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의 대선 캠프 오른팔이었던 헨리 클레이를 의심하는 이 음모설은 이미 세간에 꽤 알려진 내용이기도 하다.

음모설의 대강은 이러하다. 대선승리의 주역이었던 클레이는 자신의 배경을 총동원해 해리슨을 도왔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지 못한데 대해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해리슨의 취임 후 클레이는 계속해서 요구사항을 전달했고 매일 같이 찾아와 괴롭히는 클레이를 못마땅히 여긴 해리슨은 끝내 클레이의 백악관 출입까지 금지시키고 만다.

이때 해리슨은 자신의 언짢았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스터 클레이, 대통령은 자네가 아니라 날세.” 클레이의 요구사항들은 대부분 대통령이 지명하는 인사 문제였지만 음모론의 초점은 연방은행의 활동 강화에 맞춰져 있다. 거대한 금융그룹이 배후에서 클레이를 통해 해리슨을 조정하려 했고 해리슨이 말을 듣지 않자 암살했을 것이라는 거다.

전혀 근거가 없어 보이지는 않는 이 음모론이 만약 사실이라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막강한 권력을 놓고 벌어지는 암투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음을 두고 볼 때,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국이례 가장 치열했다던 1840년의 대통령 선거, 수많은 인신공격과 비방 그리고 음모가 난무했던 그 선거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 해리슨은 역사 속에 가장 짧은 임기의 대통령이란 기록을 남기며 이렇게 사라지고 만다.

참으로 인생이 덧없음을 알려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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