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기간: 1849-1850 / 단임 / 휘그당.
12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1848년의 대선은 민주당의 ‘루이스 캐스’와 자유토지당의 마틴 밴 뷰런’ 그리고 휘그당의 ‘재커리 테일러’가 맞붙는 삼파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만 해도 ‘앤드류 잭슨’의 인기가 채 식지 않은 상태여서 민주당은 재집권을 쉽게 노릴 수 있었는데 뷰런의 갑작스러운 대선출마가 악재로 작용하면서 결국 휘그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민주당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뷰런이 탈당하여 자유토지당의 대선 후보가 된 일은 민주당 지지세력의 분열로 이어졌고 그에 대한 반사이익을 고스란히 휘그당이 얻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휘그당의 입장에서 보면 거저 얻은 결과나 다름없었다.
민주당과 휘그당의 양자 구도 속에서 한쪽 사이드의 분열은 곧바로 균형의 파괴를 의미했고 선거의 패배는 자명한 현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휘그당은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고도 쉽게 정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얼마 전만 하더라도 휘그당은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해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 때 혜성처럼 나타난 이가 다름 아닌 ‘재커리 테일러’였는데 그는 전쟁영웅으로 유명한 ‘조지워싱턴’과 ‘앤드류 잭슨’ 의 인기를 나란히 하며 수면에 떠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인생 중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야말로 역전의 노장이었다.
대부분의 세월을 인디언 토벌전에서 보냈고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바 있다.
그가 정가의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선거를 불과 일 년 앞두고서였다.
서부 영토 확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전의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뷰에나 비스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일약 스타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얻게 된 유명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땅한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던 휘그당에 의해 다음해 치러지는 대선의 후보로 지명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정치성향을 내색하지 않고 있던 터라 그의 영입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테일러 자신 역시 입당에 앞서 오래 전부터 휘그당 성향이었다고 피력하면서 테일러의 정치 데뷔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특히 전쟁터에서 보낸 많은 시간들이 그로 하여금 국수주의적 성향을 갖게 했는데 바로 이런 부분들이 그로 하여금 보수성향의 휘그당과 더 잘 어울리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테일러는 노예제도 옹호론자로 인식되며 남부 인들의 지지까지 얻게 됨으로써 일찌감치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어쨌든 평생을 야전에서 보내며 정치적 배경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는 비교적 순조로운 데뷔전을 치르며 미국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재커리 테일러’,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성장과정에서 특별한 점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버지니아의 평범한 농부 가정에서 아홉 자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가족과 함께 이주한 켄터키의 척박한 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특별히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어서 일찌감치 군인의 길을 결심한다.
당시 게을리 했던 초기교육의 부작용은 이후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녔고 대통령 취임 후에도 교육부재의 구설수에 자주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다른 역대 대통령들의 훌륭한 성장환경과 교육배경 그리고 지적인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평범하기 그지 없어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낡은 모자와 허름한 군복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일쑤였으니 선출된 왕쯤으로 여겨지던 초기 대통령들과 매우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국정 운영에 있어서도 지극히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 그의 오랜 군 생활과 성장배경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된다.
특히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과 북이 갈라져 나라를 둘로 나누자는 분리론이 나왔을 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분리주의자들을 모두 잡아 공개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것은 야전 지휘관 출신의 그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정치스타일이라 보여진다.
아무튼 그의 스타일도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
강경한 입장표시가 분리주의자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고 남북전쟁의 불씨 또한 한동안 잠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하게만 보였던 그였지만 애석하게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 죽음을 맞이한다.
1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기에 대통령으로서의 업적도 그리 많질 않다.
굳이 주요 업적을 언급하자면 국내문제로서는 분리세력(노예제도를 두고 남과 북으로 나라를 분리하자는 세력)의 제압과 보호관세 철폐 그리고 연방은행 설립 반대 등을 들 수 있고 국외 문제로는 영국과의 관계개선 노력 정도를 꼽아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주요 정책들은 그 실행과정에서 당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는 다시 말해서 대통령 취임 후 그의 태도가 사뭇 바뀌었다는 말인데 사람의 마음이 아침과 저녁이 다르단 말처럼 이미 그는 휘그당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꼭두각시 테일러가 아니었다.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며 또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그 자신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테일러의 모습에 휘그당은 크게 당황했고 또 실망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봐야 했다.
세간에는 테일러가 주요정책에서 당론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다.
당내 불협화음 혹은 당 지도부와의 갈등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들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다.
말 안 듣는 대통령을 제거하고 부통령으로 하여금 권력을 유지한다는 시나리오, ‘역적은 구족을 멸한다’라는 옛말에서 주는 느낌처럼 우리로서는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주요 세력과의 갈등으로 요인이 암살되는 일은 가끔 있는 일로 특히 미국 역사 속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누구도 명쾌한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어 그 진실 여부는 가릴 수가 없다.
갑작스러운 테일러의 사망 역시 암살음모였다는 주장이 종종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실시한 사체 검시에서 독살이 아니라는 결과가 보고되었는데 결과를 믿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 음모론은 계속 거론된다.
그의 죽음이 또 흥미로운 점은 ‘테쿰서’ 추장의 저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9대 대통령 ‘해리슨’ 편에서 언급했던 이 이야기는 20년마다 돌아오는 0자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미국의 대통령들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인데 테일러의 경우 1848년에 선거를 치렀는데도 불구하고 저주론이 거론되는 것은 그의 군 경력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군 복무시절 수많은 인디언들의 목숨을 앗아 갔으며 또 저주의 당사자인 테쿰서 추장의 마지막 전투에도 직접 참전한 바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진실 여부를 가리기는 힘들겠지만 미국의 역사와 현 주소를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만한 가설들이라 보여진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억제했던 국내의 주요 논쟁들은 몇 년 후 내전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특별한 치적으로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의 업적은 상당부분 미국 성장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맺어진 국제 조약들은 독립전쟁 이후 계속된 양국의 긴장상태를 다소 완화시켰음은 물론 새로운 화해와 협조무드의 조성으로 미국의 번영을 추구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그가 기대 이상의 공적을 이뤄냈던 것이다.
한편, 평생 노예를 소유했던 테일러는 재임기간 중 한번도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그가 국론의 분열로 나라가 시끄럽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평생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던 점과 그의 외아들이 남부군 장군으로 참전했던 점 그리고 그의 딸이 훗날의 남부연맹 대통령과 결혼했었던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노예제도 찬성주의자였음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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