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성서침례교회 김우생 목사
누가는 누가복음 7장에서 3가지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병들어 죽게 된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을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그 종을 낫게 한 기적을 베푸신 기사(2~10)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나인 성의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큰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11~17). 그리고 나머지 하나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하신 그것은 예수께서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하시고 새 삶을 주신 기적을 베푸신 사건인 것입니다(36~50).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27).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은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가장 위대한 결과를 낳는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영광스러운 새 삶, 감사하며 사랑하면서 사는 삶’을 낳게 하는 것이 용서요, 그 용서의 가장 위대한 결과라고 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용서가 있기 위해서는 가장 큰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신 사랑의 희생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35).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세 있는 자” 같이 말하는 위대한 선생인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호기심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경 강해자들은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고소할 허물을 찾기 위하여 악의적인 의도로 예수님을 초청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 관습은 유대인의 가정에서 손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는 경우에 이웃이나 그 마을에 있는 누구든지 와서 손님과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마을에서 ‘죄인’(창녀)으로 알고 있는 여자가 시몬의 집에 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체하는 바리새인 시몬을 대단히 당황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경우를 예로삼아 “용서와 용서 받은 자의 변화 된 삶”에 대하여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용서와 용서 받은 자의 변화 된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본문 중심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두 사람 바리새인과 죄 많은 여자는 서로 대조가 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종교생활(기도, 구제, 금식 등)을 하였으며 쉽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음이나 음행 등 육체적인 죄는 짓지 아니 했을지 모릅니다. 그 마을에서 죄인으로 알려져 있는 그 여자와 비교하면 아마도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5:27,2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바리새인 시몬은 이 여자가 부도덕한 여자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행하여야 할 통상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결례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과 비교해서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 시몬에게 그가 하지 아니한 것을 지적해서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 하였으되”(44)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45)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4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라고 정죄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독선과 교만, 위선으로 가득 찬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자도 “많은 죄”가 있었음을 인정하셨습니다(47,48). ‘숨은 죄와 드러난 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 의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죄인임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7:41~4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을 때 영어성경에서 ‘죄’는 ‘빚’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같이 나의 빚을 탕감하여 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받는 쪽에서 보면 용서는 하나님의 가장 크신 선물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신 비유(눅 7:41~42)에서 은혜를 보게 됩니다.
위 말씀에서 그 초점은 죄 용서받는 것은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엡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용서는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 많은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죄가 용서함을 받으니까 새사람, 변화된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체험하면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여자는 용서받고 사랑이 많은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4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원인이고 사랑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용서 받는 것은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용서받은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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