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유감

홍문종 / / 기사승인 : 2012-09-05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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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 국회의원

(홍문종 국회의원) 흉흉한 민심에 뉴스보기가 겁난다. 언제부터인가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웃음기 걷힌 거리의 표정은 삭막하기만 하다.

불신과 불안에 태평양 보다 더 먼 간극으로 마음이 벌어진 사람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지고 빈 바람 소리가 폐허처럼 무너진 가슴을 대변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과 강간과 폭력인 난무하는 현실이 만들어낸 생지옥의 실체다.

날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고 있다. 백주의 무차별 칼부림으로 인명이 살상됐고 전자발찌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범은 무고한 주부를 노렸다가 살인죄를 추가했다.

피자가게 사장의 철면피한 이기심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운 꿈을 키우던 한 여학생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솜털도 채 안가신 중학생은 건물 꼭대기에서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고서야 악마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슬픈 서사시 한편이 골목을 타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근원을 알 수 없는 ‘가해’의 충동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칼춤을 추며 돌고 있는 사이에 누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 손길에 의해 희망의 줄을 내려놓는 모습이다.

법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질서가 판을 치는 이 미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현실은 차라리 비애스럽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이 모든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업보일까 하고.

도를 더해가던 인면수심은 급기야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범죄’로 정점을 찍는 분위기다.

집 안에서 곤히 자던 7살짜리 어린아이가 이불 째 납치돼 성범죄 희생양이 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묻지마 범죄’의 극단을 보는듯한 이 사건의 범인은 지근거리의 이웃이었다.

이젠 집 안에서조차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 저마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대한민국 전체가 공분에 쌓여 흥분할 만하다.

성난 여론이 당장에 사형이나 화학적 거세로 범인 응징을 주장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이 땅에 다시는 발붙이는 일이 없도록 인간의 영역 밖으로 영원히 추방시키고 싶은 마음은 너나 없이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최선일까 망설이게 되는 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인간의 격이 이처럼 바닥이진 않았다.

특별한 손길이 아니어도 최소한 인간적 도리는 기본으로 지켜졌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임계점을 넘긴 지 오래다. 인성과 수성의 구분이 모호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등의 극단적 처방보다 범죄 취약게층에 대한 배려가 '묻지마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싶다.

‘묻지마 범죄’ 유형이 대부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서 비롯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사회안전망 확충이 답이라는 결론이다. 교도행정의 혁신이 병행된다면 공동체 모두의 안전을 위한 최적의 장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보장된 나라 범죄율이 낮다는 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바다. 사회에 대한 좌절감이나 적개심이 그들의 반사회적 인격형성을 부축이고 범죄를 충동질한 혐의가 짙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단, 예외 규정 등 운영의 묘는 필요하다. 아무리 배려해도 교정이 안 되는 대상까지도 사회안전망의 온정주의로 끌어안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걸맞는 특단의 조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나주 성폭행범’ 경우만 해도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하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왜곡된 성장기를 거친 게 화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모의 학대 속에서 굴절된 시간을 보낸 게 사실이라면 ‘괴물’로 성장한 그의 오늘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다른 범죄인들의 경우도 결손가정의 폐해가 독이 된 정황이 많다. 가족의 사랑과 배려가 한 인간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을 순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장치만 있었더라도 인생의 상당부분이 달리 쓰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설혹 교도소에 갔더라도 제대로 된 교화과정만 주어졌더라도 지금의 전과자 현황과는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우선은 성적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유해환경 부터 근절시켜야겠다. 솔직히 텔레비전을 틀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음란물이 범람하는가. 도처에 널린 도색잡지나 비디오 등으로 인한 성지식 왜곡은 그 폐해의 측량이 쉽지 않을 정도다.

휴대폰 채팅창이 새로운 성폭행 수단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을 나는 며칠 전에야 알았다.

고립의 그늘에서 커가고 있는 범죄의 독버섯을 제거하는 일도 이 못지않게 다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빈곤하거나 소외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묻지마 범죄의 시발점이 되지 않도록 좀 더 섬세한 배려와 관심으로 살피는 건 우리 사회 전체의 몫이라는 데 인식을 함께 해야 한다.

더 이상 묻지마식의 범죄가 이웃은 물론 내 고통이 되는 불상사를 막는 건 우리의 역량이다. 국가차원의 안전망으로 그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한 가장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싶다.

묻지마 범죄는 특정 개인이 아닌 전 국민의 문제라는 관점으로 국가가 나서서 개인별 맞춤형식으로 풀어내야 할 문제다. 심리적 조력이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말이다.

무엇보다 한계상황에 놓인 취약계층을 그들만의 리그로 팽개쳐버리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무한 배려의 교도행정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개개인 특성에 맞춘 합리적인 교도로 더 이상 우리 주변에 묻지마 범죄가 남용되는 불행을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건 일괄적용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지혜로운 처신이 필요한 때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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