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 야심작 젠틀맨이 젠틀하지 않은 이유는

김헌식 / / 기사승인 : 2013-04-18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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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문화평론가
창피한 일이다. 창피해하면 지거나 촌티나는 세상이라지만 이런 노래를 한국의 전 언론매체들이 보도를 하다니 놀랍기도 하다.
방통위의 심의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도 없어진 마당에 남녀의 성관계를 다룬 노래에 기대어 코리아의 문화 저력을 논해야 하다니 충격적이기도 하다.

코리아의 어원인 고려시대의 '쌍화점'에 비할 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 상황이다. 적어도 야한 노래여도 '쌍화점'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강렬하게 반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왕이 직접 부르기도 했다지 않은가. '강남스타일'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되었으니.

'강남스타일'은 강남의 허영의식과 위선을 비튼 측면이라도 있었지만, 젠틀맨은 오로지 '강남스타일'이 상징했던 섹시코드를 인터코스 코드로 만들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1등만을 남겨두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추측이 작동하기 쉽다.

'강남스타일'을 짓누른 빌보드 Hot 100의 1등 마룬 파이브(Maroon 5)를 너무 의식한 것일까. 여러 면을 보면, 마룬 파이브의 인터코스 코드에 통탄할만 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룬 파이브가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인터코스 코드를 적극 부각해 낸다면 빌보드에서 1위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터코스 코드가 마룬 파이브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구나 세계적인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기존의 음악 팬들을 위시한 헤게모니 싸움이 포진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인터코스에 후크 송을 가미하고 일렉트로닉 테크토닉을 마킹한 '젠틀맨'은 중독성을 유도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종일관 반복적인 리듬과 화음은 극적인 폭발을 일으키기에 적어도 '강남스타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
영어권을 의식한 단어들의 전면적인 배치는 케이 팝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성짐과 격렬한 감정 격발의 순간적인 짜릿함을 담보해내고 있지 못하다.대중음악의 자칫 한계를 노출시켰다. 썩어도 준치이겠다. 소녀시대의 신곡이 그러했듯이.

싸이(Psy)의 '강남스타일'에는 일정한 약자의 한이 해원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 형태로 남아있지 않다. 재미와 유희로 긴장과 이완을 적절하게 이루어내고 있다.
일종의 장자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아내가 죽었는데 북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자를 보라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겹쳐질 것이다.

뮤직비디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못생기고 매력 없는 찌질한, 가난한 청년의 속풀이가 말춤으로 해원되고 있으며 그러한 이들의 속 풀이의 클라이막스가 분명 존재한다. 말춤을 추며 자신의 상황을 우회적으로 전하는 경지는 거의 인생달관의 선승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젠틀맨'에는 이러한 페이소스가 있지 않다. '강남스타일'이 강남 밖의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의 심리를 반영했다면, 젠틀맨은 강남에서 주지육림을 부유한 강남돌이의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기조라면 당연히 댄스나 뮤직비디오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자칫 가난한 소년이 각고의 노력 끝에 아이돌 스타가 된 이후에 벌써 혀에 잔뜩 끼인 기름 때문에 혀를 느끼하게 놀릴 수밖에 없는 형국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항상 일등을 하지 못해 한 번의 인기에 감정의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는 초심자들의 심리 기제 때문인지 모른다. 눈치는 예술가에게 추동력을 잃게 만든다. '젠틀맨'이 젠틀하지만 젠틀맨처럼 보이지 않은 것은 그 사심 때문이다.

다만, 깜짝 인기에 둔감한 채 뮤지션 활동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강력하고도 둔감한 심장은 단련 속에 나올 것이고 젠틀맨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일이다.
모두 예상했고 하고 있듯이 케이 팝의 갈 길은 아직 멀다. '강남스타일'이 수십곡 나와야 그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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