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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세 객원기자 |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는 별호를 얻었던 이덕무를 들 수 있다. 이즈마엘과 달리 이덕무는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평생 수만 권의 책을 섭렵하여 당시 지식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때문에 정조는 이덕무가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규장각을 설치하며 검서관으로 발탁했다. 평생 책에 굶주렸던 이덕무에게 규장각은 천국이었으리라. 여기서 그는 조선후기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청장관전서를 펴냈는데 박람강기한 그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책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이즈마엘이나 이덕무가 낙타도서관이나 규장각의 수천, 수만 배의 정보가 담긴 스마트폰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이즈마엘은 왕의 부름을 거절할 다른 변명을 생각해야 할 걱정에 골치가 아플 것이고 이덕무는 적으나마 책을 필사해 주고 얻는 수입이 줄어들 것이 걱정되겠지만 이처럼 풍부한 정보를 지닌 현대인들이라면 우선 무척 현명하리라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모색하며 평생 한권 한권의 책에서 사유의 편린을 긁어모은 그들이기에 무한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것인 지 따위의 고민은 이미 모두 해결했을 것이라고, 자신들과 같은 사회의 길잡이가 넘쳐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무한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무한함에 맹점이 있다.
사람들은 무한한 것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이 언제든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상 누구도 공기나 물을 많이 갖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 살아가는데 책보다 더 절실한 이런 것들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유는 그 양의 무한함과 사용에 제한이 없음과 독점불가성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무한한 정보가 담기면서부터 사람들은 정보에 대한 수집 의욕도,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야겠다는 창조 의욕도 사라졌다. 남이 만들어 놓은 생각 중에서 자기 맘에 드는 것을 취사선택해 자기 생각으로 삼으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불완전한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 가지려 하겠는가? 무한한 데이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점점 더 단순해지고 사유 능력이 퇴화하고 인간미가 사라지는 이유다. 스마트폰에는 이처럼 정보의 무한성으로 인한 인간의 지식축적에 대한 욕망을 약화시키는 속성 외에 인간의 단순화를 가속화 시키는 요인이 더 들어있다. 바로 엔터테인먼트 기능과 소셜네트워크 기능이 그것이다.
학생의 경우를 보자.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스마트폰 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전문가들이 올린 정리보다 더 나은 정보를 학생 개인이 생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 시간에 남의 생각을 외우거나 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훨씬 이득이다. 입시, 취직시험을 통과해야하는 사회 구조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공부하는 동안에 게임, 드라마, 동영상 등의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거나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각각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시공의 제한성이 사라졌다. 각자 혼자 공부하는 동안에도 친구들끼리 잡담이 가능하고 흥미 있는 볼거리를 수시로 접할 수 있다. 통제하기 힘든 이러한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에 대한 사유를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떤 대상의 실체를 모르면서 그 대상을 운용하겠다는 생각부터 한다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면, 인간인 자신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하는 것이 만사에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인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이 압도적인 명제를 피해서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 선조들은 아이들의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동몽선습과 천자문으로 공부를 시켰다. 동몽선습의 첫 문장은 “천지만물 중에 사람이 제일 귀하다”로, 천자문은 그런 귀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이 천지가 얼마나 오묘한가를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배움을 통해 우리 선조들은 이미 아이 때부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유를 시작해 그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중요시했고 항시 하늘을 두려워했다.
요즘의 아이들은 동몽선습 대신 스마트폰으로 인생을 시작한다. 옛날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이용하라는 어른들의 사랑 때문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아니라 단지 귀찮음을 면하려고 스마트폰을 쥐어준다. 엔터테인먼트 앱이 가득한 스마트폰을. 엔터테인먼트는 단순히 “오락‘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원인 프랑스어의 앙뜨러뜨니(entretenir)가 ’특정한 틀에 붙들어 매다”라는 뜻을 가진데서 알 수 있듯이 엔터테인먼트는 그를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데 주의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영화관은 말 할 것도 없고 빵집도 자유롭게 갈 수 없었다. 엔터테인먼트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제어 할 수 있는 나이의 사람에게만 유용하다는 것을, 그렇지 못한 나이에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사회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스마트폰을 자기 아이들의 목에 걸어주는 요즘의 어른들을 보면 기가 막힌다.
스마트폰은 연령대별로 그 기능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처럼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성인물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 아무 때나 게임을 할 수 있는 스마트폰, 마음만 먹으면 테러범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스마트폰은 절대 나이에 관계없이 사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다음 세대에도 이즈마엘이나 이덕무같은 사람이 생겨나기를 바란다면 스마트폰, 이대로 좋은 지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스마트폰을 모르고 어른이 된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늦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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