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8-18 1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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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1) ‘낮에 뜬 별’들의 행진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방문객, 그는 한남마을에서 온 이현석이었다. ‘영재의숙’ 1년 선배로서 이만성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벌건 대낮에 낯선 얼굴까지 끼여 벌어지고 있는 술자리에 뛰어든 느낌이어서, 이현석은 당혹해 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만성이 후닥닥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이현석의 손목을 붙잡고 대청마루 안으로 끌어들였다. 곧 아버지와 서병천에게 인사소개를 했다.

“사실은 고정관형의 심부름으로 온 걸세, 마침 아버님을 뵙게 되고, 서울에서 오신 선배님도 알게 되었으니 간밤에 돼지꿈 꾼 보람 있다니까”

이현석은 술상 쪽을 흘끗거리며 방문이유를 밝힌 다음, 호주머니 속의 쪽지를 꺼냈다. 이만성에게 보낸 고정관의 전갈(傳喝)쪽지였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이만성은 중얼대며 쪽지를 받았다.

“급한 일이라기 보다도 아마 내일 제주읍에 함께 가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내용이 아닌가 싶네만… 어서 펴보라구!”

이현석은 자신의 예측을 곁들이면서 나직히 채근을 했다. 이만성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망설이다 쪽지를 조심스럽게 폈다.

<관생(冠省). 앞서 논의한 바 있는 우리의 계획을 서둘러야 될 것 같소. 내일 아침 제주읍으로 건너가서 김대호 수석부위원장님을 만나뵙으면 싶은데…. 대단히 송구스런 일이지만, 춘부장님의 소갯장이 필요하오.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서 소갯장을 휴대하고, 만성군이 꼭 동행해 주기 바라오. 조용석군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 그리 알고, 내일 아침 9시에 도선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만납시다. 한남마을 고정관>

“그렇잖아도 저녁나절에 한남마을로 내려가서 고정관선배를 만나보려던 참이었는데…. 아버님 죄송합니다만, 김대호 선생께 소갯장을 써주셔야겠습니다.”

이만성은 문제의 쪽지를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어려울 것 없다. 써 주마”

이양국은 쪽지를 읽고 나서 빙그레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쾌히 승낙을 했다. 혼자 쓸쓸한 모습으로, 마치 따돌림이라도 당한 것처럼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서병천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서병천의 얼굴위로 쏠렸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입을 연 사람은 이만성이었다.

“고정관씨와 서형은 전공과목만 다를 뿐 똑같은 K대학 동창이 아닙니까? 제주도에 내려와서 아직 만나보지 못하셨겠지요?”

서병천이 움찔하며 눈빛을 번뜩였다. 긁고싶어도 긁을 수 없었던 등덜미의 가려운 부위를, 고양이 발톱 같은 것을 휘둘러서 이만성이 확 긁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곧 서병천의 얼굴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빨리 만나고 싶어요. 고형은 대학 동창이자 ‘조선학병동맹’에 함께 소속되어 있는 동지이기도 해요. 그는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이고 저는 조직부장을 맡고 있지요. 그 친구와 만날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는데요. 내일 아침 함께 갔으면 좋겠소 만성형!”

언제 움츠리고 있었더냐 싶게 서병천은 목에 힘을 주고, 침방울 튀기며 ‘학병동맹’을 들먹였다. 이만성은 약간 저항감 같은 것을 느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씽긋 웃어버렸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도선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나가면 서로 만나게 될테니까요. 그리고 제주읍에까지 동행하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이만성은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기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한술 더 떠서 푸짐하게 선심(善心)공세를 폈다. 서병천의 입이 함박만큼이나 헤벌려졌다.

“그럼 제가 고형 앞으로 쪽지를 써 보낼게요. 이현석씨! 저의 쪽지 전해주시렵니까?”

“네, 걱정말고 써 주십시오. 배달부노릇하는데엔 자신이 있으니까요”

잠시 후 이현석은 서병천의 쪽지를 갖고 한남마을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만성과 서병천은 이튿날 아침 도선마을 버스정류장으로 함께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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