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8-25 18: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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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4) ‘낮에 뜬 별’들의 행진
김대호부위원장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건 필경 앞길에 만만찮은 장애물이 가로놓였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건강때문이든가? 둘 중의 하나임엔 틀림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 건강-그는 1000여명 제주해녀의 권익을 옹호해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악독한 일본경찰과 맞서 피나는 항쟁을 벌여온 이 고장 제 1의 항일투사였다. 물고문, 전기고문, 손톱뽑기 등 온갖 살인고문을 당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뼈를 깎는 고통,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골병에 시달려 온 동안, 얼굴에 핏기를 되찾을 겨를이 없었을 것은 집작이 가고도 남을일 아니겠는가? 이만성은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저, 선생님! 아버지가 이 편지를…”

편지를 내밀면서 이만성은 말끝을 흘렸다. 김부위원장은 편지를 받아 겉봉을 쓱 쓸어보고는
“아니, 이양국씨가…? 그럼, 자네는 자제분이란 말인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더듬거리며 아래위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놀라며 감격해하는 얼굴이었다.
“진작 찾아 뵀어야하는데… 용서해주십시오!”

이만성은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김부위원장은 마치 친자식을 대하듯 다정스런 몸짓으로 손을 꼬옥 잡았다 놓으면서 “자네들, 잠깐 앉아있게, 곧 나올테니…”하고 황급히 부위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조용히 편지를 읽기 위해 잠깐 자리를 뜨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그는 비서실로 고개를 내밀더니, “자네들 두 사람은 잠깐 밖에 나가서 기다려주게, 점심시간도 되었고, 식당에 가 있든가…”

오진구와 김덕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의의 추방령을 내리고 나서 “자네들은 내 방으로 들어오지!”
하고, 까딱까딱 손 신호를 했다.

고정관 이하 네사람은 부위원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무렵 마주 붙은 위원장실은 텅비어 있었다. 점심때가 되었기 때문일까? 위원장 이도인(李道仁)은 집무실을 비워놓고 있었다. 오진구와 복도에서 헤어진 김덕규는 비서실에서 쫓겨나기 바쁘게 위원장실 안으로 슬그머니 잠입을 했다.

언제 뚫어놓은 구멍인지, 구석쪽 벽에 작은 구멍하나가 빠끔히 뚫려있었다.

김부위원장을 감시하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 그렇다면 김부위원장은 이도인위원장의 하수인에 의해 감시를 받아왔더란 말인가? 김덕규는 숨을 죽이고 구멍에다 바싹 귀를 기울여 부위원장실에서 주고 받는 얘기를 도청(盜聽)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네 사람이 부위원장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김부위원장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안으로 방문을 닫아걸었다. 고정관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제주건준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며칠전 아놀드군정장관은 인민공화국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청임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말입니다. 그래도 되는겁니까?

아놀드는 인민공화국의 국(國)자를 빼고 그대신 정당으로 명칭을 바꾸라는 얘기라니, 왠지 짙은 먹구름이 눈앞을 가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듣자니, 여운형선생도 곧 인민위원회를 탈퇴할 것이라는설도 있더군요”
침방울 튀기며 한바탕 떠들었다.

“하지만, 너무 실망할 것 없네, 38선 이남이 몽땅 미군정지배하에 들어간다해도, 우리 제주도는 달라, 제주도만은 ‘건준’을 해체하지 않을걸세. 그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고 중요한 것은 이 땅 제주도만은 30만도민의 이름으로 홀로 일어서고 홀로 지킨다는 데 뜻이 있다고 나는 믿네, 제주는 더 이상 강한자의 밥이 될 수 없어. 이에서 신물이 나지 않는가?

몽골·고려·이조·일제식민지를 거치는 동안 짓밟히고 박탈당하고, 이 땅의 사람들은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잖은가. 자네들의 투지와 분발을 요구하고 있는 마당이라구”

김부위원장은 파르르 입술을 떨며 왕년의 투혼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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