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게 내뱉은 짤막한 말 끄트머리에 ‘다음 들를게’라는 군더더기를 붙이고 싹독 잘라버렸지만, 그것은 누가보더라고 얄팍한 쇼거나 시험용 애드벌룬 쯤으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이만성의 심중엔 겉 따로 알맹이 따로 식의 2중성 빛깔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단호한 ‘결별’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왜, 이러세요? 오빠답지 않게... 지성인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람 실망시키지 말아요, 네!”
울음섞인 목소리를 씹어뱉으며 영선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방문을 가로막고 버티어선채 표독스럽게 눈알을 부라렸다. 여태까지 깊숙이 간직했던 두꺼운 베일 속 얼굴을, 엉겁결에 드러낸 셈이었다.
양 같이 어질고 착한, 그리고 발로 밟아도 꿈적않을 무골충 같은 소녀쯤으로 보아왔었는데, 그녀에게 ‘저토록 툭 쏘는 옹골찬 구석이 있었구나!’ 싶자 이만성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눈이 부실정도로, 황홀감과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불쾌하긴 커녕 마냥 기쁘고 흐뭇했다. 이만성은 꿈 같기만 한 현실 앞에 어리 뻥뻥한 나머지 침 먹은 지네 꼴이 되고 말았다. “제가 까무라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실망하셨나요? 오빠의 눈은 그렇게도 투명치가 못해요? 상대방의 맘속을 전혀 꿰뚫어 볼 수 없는, 장님의 눈은 아닐텐데 말예요. 생각해보세요. 어지간한 일이라야 울고불고 까무라치고 그러죠. 한평생 항일 투쟁으로 독립운동하셨고, 새 시대를 맞아 빛을 보려고 뛰어다니시다 비극으로 끝장난 마당에, 피붙이의 눈에서 어떻게 눈물이 나와요? 바싹 말라버린 눈물인데...그리고 까무라칠 기력도 꺾일 대로 꺾이고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는데 까무라칠 건더기도 없는걸 어쩌겠어요?”
영선은 피로 얼룩진 목소리로 단숨에 애끓는 연설문 읽어 내려가듯 장광설을 늘어놓고 나니, 목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이만성에게 있어서는, 그런 의문보다도 눈앞에 벌어진 절박한 장면이 문제였다. 한가로이 궁금증이나 풀며 방관자 노릇하기를 용서치 않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임을 외면할래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도 가슴 한 복판에 차곡차곡 쌓아둔 아름드리 슬픔과 아픔이 폭발할 것처럼, 목구멍을 짓누르며 복 바치는 바람에 감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흐느껴 우는 목소리는 비교적 낮았지만, 가슴속을 휘몰아치는 강도(强度)와 진폭은 그녀 못지 않게 크고 높았다. 약 10분 동안 두 사람은 경쟁이라도 벌이듯 목을 놓아 울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울음을 멈춘다면 패배요 치욕임을 계산에 넣은 듯, 울음의 경쟁은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는게 이김이라고 너그러움을 과시한 사람은 이만성이었다. 그는 애써 울음을 멈춤과 동시에 손수건을 꺼냈다. 먼저 영선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의 눈물도 말끔히 훔쳤다. 기분전화을 위한 준비운동의 필요성을 이만성은 느꼈다. 그는 윗몸을 일으켰다가 90도로 꺽었다. 왼쪽 팔로 그녀의 미끈한 두 다리를 끌어안음과 동시에 오른쪽 팔로는 갸날픈 목을 끌어안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다음, 두 번 세 번 눈코 뜰 사이없이 헹가레치고 나서 그녀를 방바닥에 살짝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하고 울음의 메아리는 흐느낌의 율동을 부채질하면서, 그 볼록한 가슴을 무자비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만성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번은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그녀를 낚아채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고 불티나게 얼굴을 비벼댔다. 그리고 숨가쁘게 방바닥을 뒹굴었다. 난생 처음 시도해본 멋쩍고 어설픈 연극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결코 무위로 끝난 것이 아니었음을 이만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오빠! 슬픔도 슬픔이지만 무서워요. 오빠는 저와 엄마를 보호해 주셔야 해요. 언제 몰살당할지 모른단 말예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아까 벗어놓은 웃저고리 호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 이만성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쪽지, 아니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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