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20 17:03:45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6) 큰나무, 설땅이 없다

“이건 편지잖아? 어디서 누가 부친...?” 이만성은 편지를 집어들고 앞 뒤 양쪽 면을 들여다보았으나 발신인의 이름이 없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어서 읽어보시기나 하세요. 아버지의 편지로 위장한 가짜 편지라구요. 악당이 부친 편지란 말예요.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빠에게 상의하려구...” “그럴 수가...? 도대체 어느 놈의 짓일까?” 이만성은 이를 갈며 봉투속의 알맹이를 꺼냈다.

-영선이 읽어보아라!

그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단다. 집에 다녀올 겨를이 없었지 뭐냐.

집안에 별일은 없겠지? 아버지에게 급한 일이 생겼어...말못할...멀리 떠나야겠기에, 인편에 몇 글자 적어보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당부하는 말 꼭 명심해야 한다, 뭐냐하면 이 땅에 머잖아 ‘괸당’들끼리 죽고 죽이는 큰 난리가 일어날 것 같구나!

내가 없더라도 약해지지 말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 이 아버지에겐 견디기 어려운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멀리 떠나게 되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란다. 뭐냐 하면 일제 앞잡이 노릇 해온 인간들이 살려달라며 극성스럽게 매달리는 것이겠지만, 딱 잡아떼었더니만 나에게 민족반역자다, 일제앞잡이다 하고 거꾸로 뒤집어씌우지를 않겠니?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서 피난이라면 우습지만, 자리를 내놓고 떠나게 되었으니 그리 알고 있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시국문제에 절대로 끼어 들지 말 것이며,

‘영재의숙’에도 안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원수처럼 대하기 쉬울 테니까. 그 점 각별히 명심해라. 아버지에 관한 일은 깨끗이 잊고, 어머니 잘 모시기 바란다. 10. 24. 아버지 씀-

“영선이 머리가 보통이 아니군! 이건 아버지의 편지가 아니야. 조작된, 악당들의 협박 편지라구. 영재의숙에 결석하지 말고 잘 나가도록 해! 그런데, 이 편지는 누구에게서 전달받았지?” 이만성은 한차례 쭉 읽어보고 나 서, 독후감과 곁들여 배달부 아닌 배달부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이 마을에 김정애라고 젊은 해녀가 있어요. 일제의 앞잡이들이 군침 흘려온, 꼴값하는 여자하나 있다구요. 그여자가 엊저녁 저에게 살짝 갖다 주더라니까요” “음, 그랬어? 도선마을 방준태와 죽자살자 놀아난, 그 여자 얘기 많이 들었지. 그 여자가 전해 주었다니 더욱 수상쩍은 일이군!” “어떻게 그런 여자를 오빠가...?”

“소문이 짜하게 나있던데! 그 여자의 주변을 기술적으로 캐볼 필요가 있겠는걸! 그 관계는 내게 맡겨. 위험한 짓 꿈도 꾸지말구...”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저도 그렇다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탐정이 따로 있나요? 저는 태껸을 절에서 배웠기 때문에 남자들을 상대로 싸울 자신도 있어요. 기어코 제 손으로 악당을 때려잡고 말 거예요!”

“아, 그래? 선생님은 참 행복하신 분이구나! 이런 훌륭한 효녀를 두셨으니...” 이만성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편지는 내가 보관할게. 항상 나하고 연락 취하는 거 잊지 말구! 그럼, 다음 또...” 이만성은 후닥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버지를 만나 뵙는 일이 다급하다고 여겨져서, 단숨에 달미동으로 내달렸다. 때마침 아버지는 외출 하셨다가 금방 돌아오신 참이었다.

“아니, 제주성안에 간다고 했는데...어떻게 된 일이야?” “네, 사정이 있었어요. 말씀드릴게요” 이만성은 도선마을에서 오진구와 윤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들은 김대호 선생 실종에 관한 얘기를 자상하게 말씀드렸다. 그리고 편지를 내놓으면서 김영선을 만나고 달려왔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양국은 충격을 받고, 한창동안 말문이 막힌 채 절망적인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냉정을 되찾느라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미 일은 터졌으니 체념은 하되,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어쩌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편지는 가짜 틀림없어. 기다려 보는 게야. 1년이고 2년이고 깊게 내다보면서...” 이양국은 귀기어린 목소리로 마치 꿈 풀이 하듯 말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