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나자 정부는 해양경찰을 해체했고 국회는 세월호 사고 반성과 진상조사 및 국가재난방지체계 혁신을 위한 특별법안 (1910621)을 발의했다. 이번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아니 그랬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고는 주무부서가 없어서도 아니고 법이 없어서도 아니라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완전히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은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결코 만들어진 적이 없었으며 이 사실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고는 인간이 활동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재난이다.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 관련자를 엄벌하겠다는 엄포는 일어난 사고의 아픔을 달래려는 인간의 무력함의 소치에 다름 아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책을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다. 이번 사고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
세월호가 침몰하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프지만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작업하던 민간 잠수사 이민섭씨와 이광욱씨가 각각 5월 6일과 5월 30일에 사망했다. 전 국민의 아픈 가슴이 또 한번 찢어졌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었나? 누구로부터 명령을 받은 적도 없는 이들이 왜 목숨을 잃었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신이라고 살아있는 목숨보다 덜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니다. 미국이나 우리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시신을 찾아 수십 년씩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고 홍수가 나 조상 묘가 유실되면 가족들은 조상이 다시 한 번 돌아가신 것처럼 애통해 하며 사라진 시신을 찾아 헤맨다. 이번 사고를 봐도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이 여전히 바닷가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살아 돌아오면 오죽 좋겠는가마는 시신이라도 수습하여 가족들과 마땅한 작별의 시간을 가지고 보내야 하겠기 때문이다.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은 행여 어디엔가 살아있다 돌아올지 모른다는 헛된 바람에, 떠도는 시신에 닥칠 신체적 훼손에, 고혼이 처할 외로움에 평생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았기에 민간잠수사 이민섭씨와 이광욱씨는 목숨을 잃었다. 빠른 물살로 언제 시신들이 유기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안전한 잠수 규정을 모를 리 없는 베테랑 잠수사인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니 목숨을 바쳤다.
세월호 침몰로 고혼이 된 생명이나 시신 수습 중 목숨을 바친 두 잠수사의 생명이나 그 소중함에서 무엇이 다른가. 시신 수습작업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같은 희생이 반복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앞으로도 이번 사고처럼 어려운 여건 하에서 시신수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책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모두가 선박 침몰 사고 예방 대책에만 골몰하고 있다.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시신수습이 쉽도록 하는 방안은 왜 생각 안하는가?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추가 희생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은 왜 안하는가?
인체추적 전자밴드 착용의무화법을 만들자. 모든 선주에게는 배에 구명정과 구명조끼와 함께 근무자와 승선 가능 인원수만큼의 전자밴드 비치를, 선원과 승객들에게는 그것을 승선 시 착용하고 하선 시 회수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특정인을 감시할 수 있는 전자기기가 고안된 것은 이미 5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이러한 발상은 전자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현실화되어 미국에서 특정 범죄자에게 처음 전자발찌를 만들어 채운 1984년 이래 현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10여 개국 이상이 GPS 위치추적 방식을 도입한 인체추적기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한 전자밴드도 이미 상용화 되어 있다.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다만 비용이 문제 될 수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자발찌의 제작단가가 170만 원 정도니 적은 금액이 아니다. 더구나 이것이 장시간 수중에서도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들려면 더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인 시신수습에 따른 비용과 그에 따를지 모르는 인명 희생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전자발찌는 현재 범죄자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이와 유사한 전자밴드를 차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이의 사랑하는 아빠이자 아내의 소중한 남편인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야한다면 누군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생명보험은 왜 드는가? 남은 가족을 위해 ‘나의 죽음’이라는 절대적으로 떨치고픈 생각을 감수하고 드는 것 아닌가? 죽은 잠수사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 보자. 거부감 때문에 전자밴드를 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겠는지. 나라면 흔쾌히 전자밴드를 차겠다. 자동차를 타면 안전벨트를 매는 것처럼. 안전벨트가 내 목숨을 지켜줄 수 있듯 전자밴드 또한 남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있고 또 유사시 내 가족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을 텐데 어찌 기분이 문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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