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불곶 바닷가에서 북쪽으로 1㎞쯤 떨어진 곳에 도선마을은 자리잡고 있었다. 3백여호를 헤아리는 이마을은 동과 서의 너비보다 남북으로 길쯔막하니 뻗어있어서, 마치 조선반도의 형국을 떠올리는 이색적인 마을이라고나할까?
한남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그 규모에 있어 작은 마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일주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어서 마치 2개의 쌍둥이 마을이 맞대면을 하고 있는 형상, 그것이야말로 이 마을의 특색으로 꼽을만한 대목이었다. 한남마을에서 도선마을로 이어진 도로는 두가닥으로 틔어있었다.
동쪽 모서리에서 뻗은 ‘말길(馬路)’과 서녘가장자리를 휘감은 ‘구명물길’이었다.
이현석을 앞세우고 고정관과 조용석은 인적이 뜸한 구명물길을 택했다. 비좁고 우툴두툴하고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목을 한참 걸어 올라갔을 때, 커다란 슬레이트 지붕이 확 눈길을 끌어당겼다.
‘도선초등학교’ 건물이었다.
“작년에 내가 군에서 휴가 왔을 때, 일본인 학교장의 부탁으로 운동장에서 열변을 토한적이 있었지, 학부형과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대성황을 이뤄었다구. 나의 목소리도 지축을 뒤흔들었지만, 박수소리 또한 꽤 요란했었어. 그날의 감회를 나는 잊지 않고 있다네. 도선마을은 내게 있어서 생소한 마을이지만, 학교건물을 대하니 끈끈한 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군!”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고정관이 회고담을 늘어놓았다.
“형님은 이 지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좋은 인상을 심어놓는 데 성공한 셈이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일본인교장의 요청이었다 해도 하늘이 준 기회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자나깨나 형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기로 결심이 되어있으니까 그리아시고, 괄시하는 일 없어야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납득이 가시겠지요!”
조용석은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섞었어도 거짓보다는 진실의 비중이 큰, 말하자면 비위 맞추기 장단인 셈이었다.
“저만 쏙 빼놓고 형님께서 제주 땅 산천초목을 흔들었건만,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후일담을 우연히 듣게 된 저의 기분이란 과히 유쾌한 편은 못 되는군요! 이건 농담 이구요. 앞으로 두 형님을 부르는 큰 집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게 될 터인데, 세 번에 한번 정도는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저는 박수치는 게 취미란 말예요”
이현석은 강한 참여정신을 보여주면서 신바람 나게 달라붙기 뒷 북을 쳤다.
“이 사람들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닌가? 목적지에 다 왔는데, 비행기 태우는 값진 선심 베푸는 성의야 고맙지만 조용히 걸어서가겠어. 비행기 안 타구…. 자네들 앞에서는 맘 놓고 농담하기도 겁이 난다니까, 하하하”
고정관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호쾌하게 웃었다. 잠시후 이현석이 입을 열었다.
“이 도선마을은 말입니다. 두 형님들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6백년이상의 연혁을 갖고있을뿐더러 인재도 낳은 마을인 것 같습니다. 학교 운동장 앞 저 벌판을 바라보십시오. 이 고장의 명물인 사장터지요. 동쪽에 드높은 쏠대 세워놓고, 서쪽에서 활을 쏘았던 곳이랍니다. 조선조때 무(武)과 벼슬에 속하는 ‘선달’이라고 있었다잖아요. 도선마을에서만 10여명이 병(丙)과에 합격해서 ‘홍색지’라는 합격증을 받음으로써 기라성 같은 선달들이 이 마을을 빛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날부터 피끓는 특공대의 본고장으로 큰소리쳐온 마을인 셈이지요”
이현석은 도선마을과 깊은 연관관계라도 맺고 잇는 듯 흥분된 목소리로 ‘선달’ 예찬을 늘어놓았다.
“음, 짐작이 가는군. 도선마을은 무사들을 배출시켜온 독특한 마을이란 것을 …. 김순익군도 그런 기질을 타고 옛 선인들의 맥을 이어온 사람 틀림 없겟지?” 고정관이 진지한 얼굴로 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저 유명한 ‘범정사항일투쟁’… 형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3·1운동 전해인 1918년에 항일투쟁이 제주도에서 선수를 쳤던 것이지요. 그 진원지가 도선마을 아닙니까”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터뜨린 이현석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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