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02 1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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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4) 불을 뿜는 海女示威

최정옥은 이성을 잃고 뜨거운 흥분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었다. 스스로 각본을 쓰고 스스로 연출한 자작극의 여파가 스스로에게 덤터기를 씌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들의 섬쩍지근한 비명소리는 고소하고 통쾌하게만 들려오던 최정옥의 귀에, 불김함과 두려움이 섞인 ‘원귀의 곡소리’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아, 황홀한 꿈의 무대는 죽음의 지옥으로 바뀌고 말았구나!

이제는 더 이상 뼈마디를 쥐어짜고 노그라지도록 몸과 마음을 혹사당할 이유가 없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련 없이 떠나 버려야 할 터인데! 하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이 무엇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찰나였다.

획. 획! 바람결에 최정옥의 귓전을 스치며 발 밑으로 연거푸 날아든 괴물체가 눈길을 끌어당겼다. 그것은 팬티-괴한들이 집어던진 강은자, 양숙희의 팬티였다. 신성불가침의 처녀왕국을 감싸고 지켜온 충성스런 수문장의 갑옷인 팬티였다. 아, 일은 점입가경, 재미있는 막바지 관문을 돌파한 셈이구나!

최정옥은 긴장했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뜯어말리자니 그렇고, 묵인하자니 후환이 두렵고…. 당장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으니,

될 대로 되라지! 하고, 자포자기하는 길밖에 달리 선택의 길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몇 시간 후면 불어닥칠지도 모를 운명의 태풍에 대한 기상예보를 낌새 챌 수 있었던들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쪽 보다는 ‘불끄기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 투신할 수 있는 각오를 다졌을 터였건만, 생각도 용기도 따라주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뜯어말린다고 괴한들이 순순히 물러갈 턱도 없을 터이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식성껏 배를 채우라는 식이 되었다. 모처럼의 그 만리장성, 누가 말릴 것인가?

최정옥은 2개의 팬티를 품속 깊이 감추고 자리를 떴다. 보물단지 같은 팬티-강은자, 양숙희의 그 ‘순결’이라는 이름의 보물을 포장했던 팬티, 그것은 이만성이라는 월척(越尺)의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데 요긴하게 쓰일 미끼였다.

‘강은자, 양숙희 두 년이 없었더라면 이만성은 이미 내 것이 되고도 남았을 터인데, 기득권 짓밟는 꼴 나는 죽어도 눈뜨고 볼 수 없단 말야!’

법률상의 남편과 아내 사이도 아니건만, 최정옥은 스스로 아내임을 자부하고 있었고, 이만성을 남편으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떡을 가진 사람은 떡을 감추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최정옥의 어리석고 경망함이란 삼척동자의 눈에도 웃음거리로 비치기 십상일터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뜯어말릴 수 없는 병적인 짝사랑, 그것은 무서운 난치병인 셈이었다. 최정옥이 본 이만성은 하늘아래 둘도 없는 미남중의 미남이었다.

잘 생긴 얼굴, 비단결 같은 마음씨, 명석하고 영리한 머리. 게다가 글짓기 잘하고 붓글씨 펜글씨 잘 쓰고 배운 것 많고 통이 크고 정의감 있고, 배짱 두둑하고…. 가는 곳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의 발꿈치를 따라갈 만한 청년을 한라산 남쪽지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최정옥은 자신의 됨됨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바도 아니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자는 속담을 무시할 자신도 없는 그녀였다. 무엇보다도 꿇린다고 생각되는 것은 얼굴과 학력이었다.

3년전에 한남마을 ‘영재의숙’에서 6년째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것 외에 내놓을 만한 학력은 없었다. 게다가 얼굴을 가까스로 박색을 면할 정도였고, 점수를 후하게 준다고 보았을 때, 미녀와 추녀의 중간치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키가 크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 쪽이 펑퍼짐한데다 탄력이 있어 바지를 입고 큰길을 걸어갈 때, 좌우로 율동감있게 실룩거리는 그 뒷모습만은 중년이상의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앞길이 9만리 같은 이만성이 ‘세컨페이스’에 현혹될 만큼 아둔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러나 이만성을 남편 감으로 점찍게 되기까지에는 절대적인 아니 참으로 이상야릇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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