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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품격이 곧 나라의 국격이 된다. 국민의 올바르고 정확한 분별력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다. 따라서 정치 수준이 곧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이 척도가 된다. 국민 대다수는 작금의 여의도에는 진정한 정치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끄럽다고 한다. 희망이 없다고 한다. 배고프다고 한다. 이것이 민심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면 시민혁명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희망이 무너지면 절망이 나타나고 이 절망이 깊어지면 횃불을 들게 된다. 우리 민족은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의 싹을 틔우는 신묘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예를 들어 홍경래의 개혁적 운동-필자가 “난(亂)”으로 표기하지 않는 이유는 지배자 관점이 아닌 피지배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개혁운동은 조선 후기에 상업, 자연과학 등의 발달로 사회의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고 교육 기회의 증가로 인해 시민이 정치. 사회를 바라보는 역량이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홍경래는 여러 정치사회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시민(농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돌아보건데 지금의 여의도의 정치적 행위는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최소한 국민은 정치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난의 굴레로 떨어지게 하고 있다. 국민은 자신들이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미래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탈감은 소외감을 갖게 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시민을 위한 정치적 논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당리당략(黨利黨略)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국민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야는 국민의 공적(公敵)이 되고 이때 시민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위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제하에 시기(when)와 그 주도자(who)와 주체, 그리고 그 방법(how)에 대해 고민하도록 하겠다.
우선 시기(when) 문제는 앞서 말한 바처럼 정치가 시민의 공적이 되는 순간부터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일 수 있으며 멀리 보면 5년 후 대통령선거 후 검찰의 혁명이나 구테타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이 또다시 정치, 경제의 후진국으로 가는 ktx를 예매해 놓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지금 여야의 정치 상황은 아무 준비없이 급발진한 자동차와 같으며 제어 할수 있는 브레이크 없는 정치가 된 것 같다. Hegel의 변증법적인 정치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그 혁명을 이끌자는 누구(who) 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시민혁명을 이끌고 갈 적합자는 종교적 지도자이고 주체는 시민이라고 본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정치. 사회개혁을 대표하는 시민혁명이다. 르네상스가 상업자본가나 귀족 중심의 개혁운동이었다면 종교개혁은 서민계급이 중심이 되어 성공한 시민혁명이다. 종교개혁 후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자인 루소(Rousseau)는 사회적 불 평등에 대한 성찰을 하였고 이를 통해 1789년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다. 대한민국 현실을 고려 해 볼 때, 역사적으로 홍경래 같은 사회 개혁가, 종교적 순수성을 가진 김대건 같은 지도자, 시민을 이해하는 정치지도자 이 셋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기존 정부와 기득권 정치 세력(정부 각료, 국회의원, 사법부 수장 등 3부 요인)은 ‘반 혁명(anti-revolution)’세력 이므로 이 세력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방법(how)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박근혜에 대한 촛불혁명, 이승만에 대한 4.19 혁명 같은 방식의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필자는 “횃불 혁명”이라 칭하고 싶다. 이 이름에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심이 이반되기 전에 여.야는 국민에게 꿈이 있는 그래서 미래가 담보되는 정치적 발전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혁명의 성공은 좌우가 어우러져야 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혁명을 가로막고 있다. 자유를 강조하면 세대 간, 계급 간, 지역 간의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고 평등을 강조하면 인간의 고유하고 중요한 핵심 가치인 자유가 희생되기 때문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은 배(君舟)이고 백성은 배를 띄우는 물(民水)이라는 는 뜻으로 백성들이 임금을 잘 받들 수 있지만, 잘못 다스릴 때는 배를 엎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를 실현시킬 지도자는 어디가 있는가? 종교적 지도자의 이미지와 어렵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여주는 혁명의 리더(leader)는 도데체 어디에 가 있는가? 그가 돌아오길 기대하며 다음을 준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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