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흥사단의 창립 위원은 8도의 청년 대표(경기-홍언, 강원-염만석, 충청-조병옥, 전라-정원도, 경상-송종익, 황해-민찬호, 평안-강영소, 함경-김종림)를 포함하여 25명이었다.
창립초기에는 회원간의 독서, 운동, 저축 등의 동맹수련 활동으로 그 토대를 굳건히 다져 나간다.
그 후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상해로 건너간 도산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8·15 해방 이후에는 미국과 중국 방면에서 귀국한 회원과 국내에 있던 회원들이 힘을 합하여 1945년 11월에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발족하고 국내 흥사단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1946년 9월, 제1차 흥사단 국내대회를 계기로 흥사단 창립의 목적과 정신을 살려 나라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미주 지역에 있던 흥사단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다.
그리고 옛 미주 본부를 미주위원부로 개칭하고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을 두어 흥사단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기로 하였다.
상해에 있던 원동위원부도 그대로 유지하여 흥사단 운동을 자치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게 했다.
자유당 시절 흥사단은 정권의 표적이 되어 여러 가지 모략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서 강좌와 언론, 청년운동 등을 통해서 거의 유일한 사회 비판세력으로서 직-간접으로 사회 민주화 과정에 기여해왔다.
또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헌정의 중단과 함께 흥사단은 2년 2개월 동안 활동정지를 당하기도 했지만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꾸준히 발전해온 흥사단은 2000년 4월 15일-16일, 창단87주년 기념세미나에서 향후 흥사단이 중점적으로 전개해 나갈 흥사단 운동의 3대 과제를 설정했다.
3대 운동은 민족통일운동, 교육·청소년운동, 반부패투명사회운동으로서 이를 통해 21세기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2001년 5월에는 창단 88주년 기념과 동시에 21세기 새로운 흥사단 운동의 하나로 투명사회운동본부가 창립되어 시민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영란기자 joy@simin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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