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로틴’이 두려운가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3-03 18: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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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고하승 {ILINK:1} 홍준표 의원이 ‘앙시엥 레짐’을 거론했다.

한나라당이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누명을 쓰고 구세력으로 몰락할지 아니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창조적으로 수용해 대안세력으로 거듭날지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앙시엥 레짐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낡은 제도’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데, 홍 의원은 왜 ‘앙시엥 레짐’을 들먹이면서 굳이 ‘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아마도 앙시엥 레짐이 본래 무수한 오류와 모순 투성이의 체제였다고 비판을 받기는 하나 그래도 이전까지의 엄연한 사회의 기틀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태양왕 루이14세는 1643년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715년까지 통치했는데, 긴 통치기간 동안 프랑스 군주의 권력을 옹호하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프랑스의 권위를 높이고 프랑스의 문화예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만들었지만 영토를 확장하기위해 전쟁을 많이 일으켰으며 베르사이유궁전같은 사치스러운 건물을 짓느라 엄청난 국고를 낭비해(지금은 관광수익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지만) 그의 후계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

이 즈음 프랑스에는 풍요 속에 곤궁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프랑스 농민의 1/3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그 뒤를 이은 루이15세와 16세는 매우 무능했다. 루이15세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영국, 프러시아에 대해 7년 전쟁을 벌였는데, 전쟁에 패해 서인도제도의 식민지와 인도를 영국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 시대의 계몽가들은 정부나 사법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서서히 굳히고 있었다.

1780년대까지도 무능하고 결단력없는 루이16세와 그의 아내 마리앙뜨와네뜨는 개화파에서 보수파에 이르는 사회 모든 계층을 멀리한 채 지냈다. 1789년 루이16세가 삼부회에서 개혁파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보려했으나 거리에는 파리의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였고 드디어 그 해 7월14일 구제도(앙시엥 레짐) 붕괴의 상징인 바스띠유 감옥이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민중의 봉기로 루이 16세 시대에 프랑스는 마리 앙뜨와네트,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배출시킨 프랑스 대혁명을 맞이하게 되고 대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1793년 1월 루이16세는 지금의 파리 콩코드광장 단두대 위에서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179 4년 중반까지 참수형으로 무려1만 7000명이 처형됐다.

물론 이들 중 마리 앙뜨와네트, 로베스피에르, 당통은 혁명의 당사자이자 반대자로서 모두 길로틴이라는 사형대에서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길로틴이 두려워 앙시엥 레짐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일뿐이다. 따라서 ‘앙시엥 레짐’은 누명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며, 노무현 정부의 혁명적인 연공서열 파괴 인사는 마땅히 환영받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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