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8-19 16: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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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2) ‘낮에 뜬 별’들의 행진

고정관과 조용석 그리고 서병천과 이만성 그들 네 사람은 예정대로 도선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일당백(一當百)씩을 자랑하는 3명의 호협한 동지들을 이끌고 버스에 올라탄 고정관은,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천하를 정복한 개선장군처럼 기쁘고 흐뭇했다.

지난날 일본땅에서 전국웅변대회가 열렸을 때마다 1등상을 휩쓸어 조선인의 명에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보람이야말로 값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눈꼴이 사나워서 그냥 보아넘길 수 없을 정도로, 오만방자한 일본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깔아뭉갰다는 데서 짜릿함과 통쾌함을 만끽했던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달리는 만원버스 안에서 맛볼 수 잇는 기쁨과 흐믓함이란, 지난날 일본땅에서 느꼈던 승리감이나 성취감 따위와는 비교가 될 것 같지 않다는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정관은 손잡이를 붙잡고 옆구리에 바싹 붙어 서있는 이만성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나마나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이양국씨 이름의 소갯장이 들어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들어온 김대호 ‘건준’ 제주도 수석 부위원장-과연 그는 어떤 인물일까?

‘관광면장타도’를 신호탄으로 벌떼 같이 들고일어나 제주도내 12개 읍·면장들을 깡그리 구정물 퍼내고 맑은 물로 채우듯 갈아치우자는 데 선뜻 찬성하리란 점을, 고정관은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제주도의 주요 행정관서(사법기관 포함)인 도청, 재판소, 경찰서 등을 제외하면 12개의 읍·면사무소가 주류를 이룬 기관들인 셈이었다.

몽골 90여년동안과 고려의 지배를 받았던 탐라국시대는 그만두고라도, 조선조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제주인들은, 그 숱한 행정관서의 벼슬아치들로부터 무자비한 탄압과 착취를 당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제주인들은 끊임없는 부대낌과 시달림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한라산의 드높은 기상을 우러르며 독립정신을 밑바닥에 깔고, 눈물겨운 투지를 가다듬어 온 게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서슬퍼런 군국주의 일본은 깨끗이 물러갔다. 식민지 신세를 모면하게 된 조선땅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신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에 속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식민지의 설움을 감수하게 했던 조선시대의 유물이나 일제시대의 잔재를 눈곱만큼도 남겨둠이 없이 말끔히 설걷이를 하고, 살충제를 뿌려서 세균을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 엄숙한 역사적 과제가 아닐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두려움도 아랑곳함이 없이 과도기를 틈타 벼락감투를 쓴 이고장의 읍·면장이라는 인간들이야말로, 30만 도민의 공적(公敵)임에 틀림이없다. 그 소름끼치는 ‘공적’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혈세를 바쳐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른 지방의 경우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제주도만은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민중의 적을, 민중 위에 군림하는 무리를 몰아내는 일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선결과제가 아니할 수 없다. 지그시 눈을 감고 굳게 입을 다문채 깊은 생각에 푹 빠졌던 고정관이 뒤숭숭한 기미를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손목시계가 11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때마침 버스는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었고…. 잠시후 네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 기다렸다는 듯 눈길을 확 끌어당긴 것, 그것은 ‘건준제주도위원회’간판이었다. ‘관덕정’앞 2층 기와집 정문앞에 내걸린 간판을 바라보며, 네 사람은 곧장 그곳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김대호수석부위원장은 간부회의에 나가고 그의 방은 비어있었다. 네 사람은 비서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 비서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그곳에 먼저 와서 기다리던 2명의 사나이 중 한 사람이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섰다.

“아니, 고정관위원장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서병천부장님도…. 여기서 뵙게 되다니…?”

“음, 어디서 많이 본 친구잖아?”고정관과 서병천이 서로 엉겨붙은 꼴로 붙잡은 손을 정신없이 흔들어 댔다. 제주읍 출신으로 ‘조선학병동맹’ 조직부차장 오진구(吳鎭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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