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준제주도위원회’ 청년부장 오진구-그는 동료인 김덕규(金德圭)를 고정관이하 네사람에게 인사를 시켰다.
김덕규는 청년부차장을 맡고 있는 작달막한 사나이였다. 누가 보더라도 교활하고 되바라지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네사람을 대하는 순간 열등감을 느낀 탓인지, 어쭙잖게 움추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차례 수인사가 교환되는 동안 비서실 안은 왁자지껄 환호의 도가니로 바뀐 것 같았다. 김덕규 한사람을 제외하고 다섯사람의 얼굴들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고정관위원장님! 제주출신 대통령감이신 고위원장님에게 거는 기대는 이만저만 큰게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발벗고 나서서 우리 제주땅에도 고위원장님 같은 큰 별이 뜨고 있다는 사실을 천하에 두루 알릴 것입니다. 고향을 위해서 더욱 힘써 주십시오!”
검붉고 우락부락한 상판과는 달리, 오진구는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했을 터이건만, 김덕규의 귀에는 얄팍한 아부성 발언으로 들림으로써 뒤틀린 심사를 애써 억제하느라 어지간히 곤혹을 느꼈을 법하다.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 시무룩한 얼굴로 오진구를 살짝 째려보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오형 갑자기 왜 이러시오? 공짜 비행기 타면 현기증 나서 못 견디는 나요. 낯선 친구도 있는데, 농담도 지나치면 우정에 금이 갈 수가 있다구. 단단히 경고를 해 둬야겠는걸”
고정관은 맘따로 말따로 기분은 좋은 듯 히죽 웃었다. 혹시 면종복배(面從腹背)는 아닐까? 등 뒤에서 생사람 잡는 악종도 많은 세상이니까 각별히 경계를 해야겠지? 고정관의 얼굴은 굳어졌다.
“너무 겸손해 하지 마세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오진구는 실없이 긴말을 늘어놓으려다 뚝 멈췄다. 문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오기 바쁘게 비서실 안으로 불쑥 들어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여섯사람은 일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김대호 수석부위원장-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낯선 젊은이들에 대한 궁금증 탓으로 약간은 굳어진 얼굴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일로 찾아온 웬 청년들일까? 그는 비서실 안에 멈춰서서 네 사람의 얼굴을 점검하듯 번갈아 훑어보는 것이었다.
“김대호선생님이십니다. 인사올리시지요”
오진규가 네사람에게 따로따로 인사하도록 권했다. 이 때 김대호는 오진구로부터 일일이 신상에 관한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진지한 얼굴로 손에 힘주어 악수를 하곤했다.
고정관은 말할 것 없고, 나머지 세사람도 김대호의 인품을 바라보면서, 맘속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정관은 비서실 안으로 김대호가 들어섰을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 링컨대통령! 하고 링컨의 길쭉하고 깡마른 얼굴을 떠올렸었다. 그런가하면 조용석, 서병천, 이만성 등은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앗 고정관! 하고 나란히 서 있는 고정관의 얼굴을 김대호의 얼굴에서 떠 올렸었다.
아닌게 아니라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두 사람의 얼굴은 2란성(二卵性) 쌍둥이처럼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이었다. 키가 훤칠하니 크고 윗몸이 구부정해서 겉모습은 허약해 보이지만 거무스름한 얼굴에 샛별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만인을 압도하는 위력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제주도 제 1의 항일독립투사가 바로 저 분이었구나! 네사람은 맘속으로 탄성을 금할 수 없었다.
1930년대초 일본이들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제주해녀항쟁’의 주동인물이 김대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8년 옥고를 치르기 직전 그는 일본경찰에 붙잡혀가서 천인공노할 온갖 살인고문을 당했다.
펜치로 손톱 뽑는 고통을 당할 때 그는 비명대신 “나라잃은 불쌍한 조선 민족들아!”하고, 조국과 민족을 외쳤다는 걸출한 그리고 눈물겨운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유명했었다. 일본고등계 형사들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면 김대호의 인품은 알고도 남을 일이다.
10여년동안 모슬포와 한남마을 세불곶 포구에서 어부생활하다 8·15해방을 맞기 바쁘게, 조국건설을 위해 발벗고 나선 왕년의 항일투사 제 1호인 김대호선생-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한조각 검은 구름이 드리웠으니 가는 길은 아직도 가파르고 험난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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