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낱말을, 최정옥은 자신과 이만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제멋대로 풀이하고 있었다.
‘하필 내가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이만성 그가 불쑥 나타나다니…. 우연이랄 수 없지. 부부가 되자고 하늘이 그를 보내준 것 아니겠어?’
꿈보다 해몽이라고, 최성옥은 ‘아전인수’ 인 꿈풀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꿈풀이가 아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8·15해방이 되기 3개월 전 늦은 봄 어느 날 오후, 천외동 냇가 좁은 길을 혼자 지나가다 3명의 일본군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아, 꼼짝없이 죽었구나!’ 최정옥은 탈출구를 찾고 있었지만 허사였고, 군인들은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그녀를 낚아채어 언덕 밑 숲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벼락치듯 덮쳤다. 겉옷이 찢기고 아랫도리는 홀랑 벗겨졌다. 굶주린 맹수로 돌변한 군인들은 앞다투어 ‘아폴로 힐’을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결정적인 운명의 순간이었는데, 도둑맞으려는 물건 찾겠다는 주인처럼 불쑥 이만성이 나타나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만성은 거룩한 구세주,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만성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특정인인 최정옥을 구출하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모험극을 벌였다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때 다른 여자가 그 지경에 처했더라도 이만성은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을 터였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그리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이 땅의 ‘괸당’들이 일본인들에게 개죽음 당하는 꼴을 보면서,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 없는 정의의 대명사 그가 바로 이만성이 아니던가?
누구인지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죽음의 위기에 몰린 여자아이를 구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가슴은 뿌듯하고 발걸음은 나는 듯이 경쾌했다.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천외동 거릿길을 지나 달미동으로 트인 길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귀신도 인간도 아닌 낮도깨비 같은 괴물이 숲 속에서 화닥닥 뛰쳐나왔다. 옷은 갈기갈기 찢겼고,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졌지만 대번에 낯익은 여자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오빠, 정말 고마웠어요.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을 거에요. 그놈들에게 윤간을 당했다면 여자의 생명은 끝장이 아니겠어요? 이만성 선생님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저의 생명의 은인이라구요. 저 하늘보다 높고 저 바다보다 깊은 그 은혜 죽은 뒤까지 잊지 않을꺼에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10번 20번 수없이 고개를 꾸벅거리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마워하는 여자아이 최정옥. 이만성은 이게 웬 날벼락이냐 싶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구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최정옥말고 다른 여자아이가 그 꼴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지만, 하필 10여년동안 ‘와신상담’칼을 갈며 복수를 다져온 원수의 집안 간나위란 말인가. 악연 치고 이보다 더 큰 악연은 없겠지? 살자, 거꾸로 가버린 정의감이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는 실패였고 둘은 성공이었다고 생각하자.
다소 위안이 되었다. 집안의 원수를 구출한 것은 운명의 악희(惡戱)였다 치고 겨레의 원수를 때려눕혔다고 생각하자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부터 최정옥은 문턱이 닳도록 이만성의 집을 들락거렸고 그때마다 앵무새처럼 ‘생명의 은인’을 노래하면서 사랑을 구걸하곤 했다. 그러나 이만성은 웃어넘기면서 한쪽귀로 흘리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기만 했다.
“제 얘기 귀담아 들어주셔야 해요. 집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들(최상균 형제)도 이만성 선생님을 물고 늘어져야지 놓치면 서로 불행해진다고, 이만저만 성화가 아니라구요”
하고, 역효과인줄도 모르고 악명 높은, 그 잘난 친일파 삼촌까지 내세워 산통을 깨곤 하는 것이었다. ‘이걸 한 대 칵! 너는 작전상 나의 꼭두각시가 되어줘야겠어. 원격조종하는 대로 놀아나는 막된 꼭두각시 말야!’ 차가운 웃음으로 마음이 딴 데가 있음을 암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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