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의 이런 위기상황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지혜가 유난히 돋보였다.
박 전 대표는 2일 오전 11시께 국회 본회의장 로텐더홀에서 농성중인 한나라당 의원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형오 국회의장의 미디어 관련법 중재안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그동안 미흡했던 부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보를 했고 국민 공감대를 형성해왔다""면서 ""이 정도면 야당이 합의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밝혔다.
그는 이어 ""김 의장이 고심해서 했다""면서 ""다만 문제되는 것은 시기를 못 박지 않았다는 것인데, 시기를 못 박는 것은 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 의장은 이날 새벽 첨예한 갈등양상을 보이고 있는 방송법과 신문법 등 미디어관련법 4개는 4개월 동안 사회적 논의 추진기구를 설치한 후 국회법 절차에 따라서 처리하고, 저작권법과 디지털전환법은 오는 4월 임시 국회 때 논의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김 의장이 제안한 중재안에 처리시기를 못 박으면, 야당도 그 중재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야당의 양보를 촉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한나라당 내 친이 강경파를 향한 압박의 성격이 짙다.
김형오 의장의 중재안에 대해 민주당은 ‘환영’모드인 반면, 한나라당은 ‘격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는 박병석 의원은 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김 의장의 중재안에 대해 “(민주당은) 사실상 동의 한다”며 “그야말로 산통 끝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다소 못 마땅한 점이 있어도 합의 정신을 존중해야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한나라당은 난리도 아니다.
당장 박희태 대표가 김형오 의장의 중재안 수용을 거부함에 따라, 이날 오전 열리기로 했던 여야 원내대표들의 쟁점법안 타결을 위한 최종담판이 무산되고 말았다.
심지어 한나라당 친이 강경파들은 김형오 의장을 향해 거의 협박수준에 가까운 어투로 직권상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경환 의원은 이날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의장께서도 현명한 판단을 하셔야 한다. 지금 한나라당은 172석의 다수당이고, 국회의장도 국회의원이 뽑는 게 아니냐. 그래서 의장에 대한 탄핵 내지는 불신임 기류도 강경하다. 의장이 중재안이라고 내놓은 게 중재안이 아니라 야당안을 들고 와서 한나라당보고 받으라는 이런 상황”이라며 “결국 국회의장과 한나라당이 대립하는 구도가 되어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같은 날 심재철 의원은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직권상정하지 않으면 김형오 의장 거취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의장 임기를 마친 뒤에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귀하시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점뿐만 아니라 지금 이런 상황에서 계속 국회의장직을 수행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복당불가론’과 ‘의장퇴진론’까지 들먹였다.
즉 김 의장이 중재안을 상정할 경우, 그를 탄핵하거나 불신임 하겠다는 으름장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나서서 중재안, 즉 김 의장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만일 한나라당 내 친이 강경파들이 김형오 의장을 협박해 원안을 직권상정 시킬 경우, 여야 갈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박 전 대표는 이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민주당의 양보를 촉구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당 내 친이 강경파들을 향해 중재안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하간 박 전 대표의 발언은 확실히 약효가 있었다.
그의 발언 직후 여야는 정치적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막판 대타협에 성공했다.
실제 한나라당 박희태·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귀빈식당에서 회동을 갖고 신문.방송법 등 미디어 관련법의 처리와 관련, 사회적 논의기구에서 100일간 논의한 뒤 '표결 처리'하기로 극적 합의했다. 이에 따라 국회는 파국을 피하게 됐다.
지긋지긋한 쟁점법안 갈등이 막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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