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정치는 늘 '국민'이라는 이름을 빌린다. 그리고 '국민'을 파는 명분의 선두에 방송이, 정확히는 방송국의 노조가 있다. 지금 그 방송들이 미디어관련법 때문에 난리다. MBC 노조는 내놓고 이명박정권의 독재타도를 외친다. 심지어 명색이 '공정방송'이라면서, 뉴스프로그램 말미에 앵커가 일방적으로 정부를 공격하는 후안무치한 일이 벌어졌다. 그런 앵커가 전혀 사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나라가 독재인가 아닌가.
검찰이 MBC 피디수첩의 수사불응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한 사태를 두고 우리는 언론우위의 민주국가라고 찬양할 것인가. 방송의 이런 태도는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려 한다는 예단을 그 이유로 한다. 그러한 예단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YTN 사장에 이 대통령 캠프의 인사를 선임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거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다. 정부 여당은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과거 방송사를 좌지우지하던 인맥의 청산이 목표가 아니라 공정한 방송을 할 기틀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면 언론사 인사에 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미디어관련법에 대해 반대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군사정권 때의 언론통폐합은 방송을 장악하여 언로를 막을 목적이 있었다. 지금의 다공영체제는 그때 만들어졌다. 그간 MBC는 민영 SBS보다 생산성이 낮으면서 상업성은 높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건 MBC가 공영의 기능이 마비되고 시청률지상주의에 빠졌다는 의미였다. MBC는 한때 민영화를 외쳤으나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노조가 득세하면서 그런 주장은 사라졌다. 노조가 편성과 제작에서 가졌던 힘을 민영화로 잃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KBS 노조 역시, 밥그릇이 된 2TV를 뺏기기 싫어 다공영체제에 동조했고, 정권 수혜로 탄생한 SBS는 다민영체제와 MBC를 국민주(國民株)화하는 것이 자사에 불리하므로 입을 닫았다. 이런 연유로 방송사 노조는 이 나라에서 가장 막강한 노조로 남았다. 방송사 노조가 내세우는 명분은 언제나 '공정방송'이다. 그러나 노조가 힘을 가지는 방송이 과연 공정방송일까. 노동조합은 태생적으로 좌파와 친할 수밖에 없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노조의 반골정신(反骨精神)이 민주화의 무기가 되지만, 문민시대에 정책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노조의 간섭은 방송을 좌편향으로 기울게 한다. 그런데도 노조의, 보이지 않거나 노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부당한 '자기검열'이 공정방송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최악의 방송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탄핵 때였다. 2002년 대선과정은 나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송의 덕을 봤다고 토로할 정도로 명백히 편파적이었고, 탄핵 때 방송은 언론학회가 지적한대로 '아무리 느슨한 기준으로 보더라도' 공정하지 못했다. 그 뒤 방송의 정치개입은 뚜렷해졌고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MBC의 피디수첩이 광우병 보도를 통하여 촛불시위에 불을 지른 것이 그 증거다.
솔직히 다민영체제는 필요하다. 방송이 많을수록, 정보와 여론이 왜곡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것이 진실이다. 다공영체제야말로 언로를 막고 공정방송을 저해할 소지가 크다. 재벌이 언론을 소유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 문제는 대주주의 지분을 5% 이하로 낮추어 인사권을 대주주가 일방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지금 다공영체제를 가지고 있는 선진국이 어디 있는가. 신문 방송의 겸영을 반대한다면 지상파에 한해 금지하면 된다. 이미 경제지가 케이블 방송에 참여하고 있는데다 신문사마다 인터넷 방송을 도입한 걸 생각하면 케이블 영역에서조차 굳이 신문방송 겸영을 막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집권한 1979년 영국은 노조가 곧 권력이었다. 노조는 이미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핸 내각을 붕괴시킨 경험이 있었다. 노조 중에서도 인쇄공노조는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대처는 노조의 특권을 끝내는 법을 통해 많은 파업을 불법으로 만들면서 법을 어긴 노조에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다. 1984년 한 해 1억 파운드가 넘는 손실을 본 국립석탄국은 탄광 20개를 폐쇄했고 광산노조는 총파업으로 대항했지만 대처는 경찰력을 동원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광산노조의 파업을 분쇄했다. 1984년 3월에서 11월 말까지 7,100명의 광부들이 폭력 혐의등으로 고발되어 2,740건에 대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1985년 3월 전국광산노조 대의원회의는 정부에 무조건항복을 했다. 노동자 3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가장 부유했던 노조였던 광산노조는 가장 가난한 노조가 되었다.
대처는 '정부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며 다른 경우에도 이 교훈이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쇄공노조는 그런 교훈을 비웃었다. 당시 인쇄공노조는 엄격한 클로즈드숍으로 운영되었고 인쇄공의 임금은 가장 높은 수준이었으며 인쇄업계는 늘 초과인력이었다. 그런데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조업중단사태가 빈번해졌다. 식자공들은 관행적으로 뉴스와 논평을 검열했다. 그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문구는 삭제되었다. 1983년 파이낸셜 타임즈는 파업으로 6월 1일부터 두달이 넘는 8월 8일까지 휴간할 수밖에 없었다.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전국 모든 신문이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인쇄공노조 역시 패배했다. 법원은 법원명령을 이행 않은 노조에 525,000파운드라는 엄청난 벌금을 물렸다. 노조는 새 일간지 '투데이'의 창간을 막는데도 실패했다. '타임스'지를 비롯해 1100만부를 발행하던 루퍼드 머독은 1986년 웨핑에 첨단기술의 인쇄공장을 준공하고 인쇄공노조가 머독의 신문이 인쇄되는 플리트 스트리트 지역을 폐쇄하자 전종업원을 해고하고 신문사를 웨핑으로 옮겼다. 경찰은 인쇄공노조의 무력시위를 차단했고 인쇄공 노조는 패배했다. 이 일로 영국에서 비공식적인 언론검열이 사라졌다.
지금 공정방송을 위해 투쟁한다는 방송노조, 그 중에서도 MBC노조는 당시 영국의 인쇄공 노조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루퍼드 머독 같은 거대자본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과, 이미 SBS에서 보듯이 언론이 스스로 비대하여 거대자본화하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민영화는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너무나 당연한 정책이며, 언론이 결코 자본에 종속되어서 안 되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싸우는 것은 다름아닌 밥그릇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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