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관심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이번 선거는 지금까지 추대 위주로 조용히 치러지던 분위기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느꼈다. 전화는 물론 메시지로 전하는 선거운동전이 마치 총선이나 대선을 방불할 정도로 열기 속에 진행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투표 장소인 롯데호텔 크리스탈 룸은 500명은 족히 넘을 전직 의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차 있어 치열한 선거 분위기를 반영했다. 그곳에서 많은 전직 의원들과 재회를 했다. 예전 분들을 만나니 과거 현역 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대선이나 총선 등 굵직한 선거는 물론 국회의장 선거를 치르면서도 오르내리며 당락을 예측하지 못하게 했던 당시의 긴장감이나 밤을 새워가며 예결위 계수조정 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의장실 점거로 이어지던 농성현장(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현실은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대통령 탄핵 등 수많은 정치현장을 함께 했던 분들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와 계셨다.
기동력이 떨어져 휠체어를 타고 나오시거나 아직 헌정회 회원으로 그곳에 나타나기엔 젊은 분들도 몇 몇 눈에 띄었다. 또 현역으로 있을 때 이른 바 힘 좀 쓰는 의원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처지가 된 이도 있었다. 3류 배우로 전락한 왕년의 스타가 느끼는 비애가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런 가하면 국회에서 만날 때보다 오히려 더 활기찬 근황을 보여 칭송과 격려는 물론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분들도 있었다.
그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풍상을 겪은 분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삶 전체를 영욕의 풍파 속에 던지고 간혹 정치 노정을 겪었던 이들을 보니 ‘교도소 담장 위를 외줄타기 하듯 사는 정치인의 숙명’이라는 말이 달리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속성이 얼마나 허무한지, 조변석개하는 세상인심에 매달려 사는 인생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과연 다른 인생을 선택했을까 궁금했다. 권력보다 국회의원 배지보다 인간의 향내를 지닌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데 동의할 수 있는지도 묻고 싶었다.
헌정회 투표장에서 만난 풍경들은 나로 하여금 정치하는 어려움과 함께 이에 못지않게 깔끔한 뒷마무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정치가문의 영향으로 비교적 영욕의 정치현장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부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덕분에 화무십일홍, 권불 십년 화두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일가견을 이룰 정도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은 상가는 찾는 이 없어 썰렁해지는 게 세상인심이다.
권력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멀쩡한 사람이 권력의 당의정에 속아 순식간에 자신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짧은 권력의 단맛 때문에 꿀독에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진상해 버리는 것이다. 나 역시 한 때 잘나가던 시절, 강제로 제동을 건 정치방학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느 꿀독에 빠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 생각에 미치면 모골이 다 송연해진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로 넘치지 않는 삶을 조율해가며 살도록 가르친 선인의 뜻도 여기에 있지 싶다.
반면교사 차원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헌정회에 한번 쯤 다녀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느 노인정이나 별 다름없는(아직도 남아있는 약간의 근엄함과 체면치레를 빼놓는다면) 헌정회에 와서 권력의 무상함을 마주하게 되면 더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세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헌정회 멤버 중 나름 벤치마킹 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 김용갑 의원(모두 전직이시지만)의 단단함, 정대철 의원의 유연함, 안동선 의원의 참을성, 조홍규 의원의 친화력, 정문화 의원의 풍부한 행정지식, 오세훈 의원의 신선함, 김문수 의원의 추진력, 양정규 의원(치열한 선거전을 통해 이번에 회장으로 당선되신)의 처세술, 임인배 의원의 배짱, 강창희 의원의 돌파력, 박준규 의원의 일어실력, 오세응 의원의 유머영어, 거기다 현역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홍사덕 의원의 매끄러운 연설실력 등을 갖춘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 싶다. 물론 소망사항으로 그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중 한가지만이라도 확실하고 바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다.
투표를 마치고 나서 점심 약속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뜨는데 국회부의장을 지내셨던 오세응 의원(전직 국회의원인 가친에게는 형이라는 호칭을 쓰고 나는 동생으로 불러 우리 집안 족보를 이상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불러 세웠다.
“이보게 홍의원, 4월 2일에 진해 벚꽃?樗 안 가겠나. 허대범의원이 우리를 초대한다네. 차비도 대준다나 어쩐다나 하는데...”
‘저 아직 공짜 여행 다니기에는 사지가 너무 멀쩡해서 한대요. 세월을 낚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요’
오 의원의 매듭 없는 호의 앞에서 대답을 삼키는 대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주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헌정회에서 찔러준 5만원짜리 봉투를 받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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