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을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기무사령부 현역 장교의 정치사찰 행위가 드러났다.
여기서 정치사찰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무리 다르게 해석을 하려고 해도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이 폭로한 기무사 현역장교의 사찰행위가 소름 끼친다.
독재정권의 망령들이 하나 둘씩 살아나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망령이 나타났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더구나 군부 독재자에게 얼마나 시달린 국민인가.
도대체 나라가 왜 이 꼴이 되어 가는가.
자유당 시절 김창룡이라는 군인이 있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정치사찰의 대명사 같은 존재며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로 항간에는 대통령의 양자라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대통령의 신뢰를 무기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김창룡.
그는 기무사의 전신인 특무부대장이었다.
그는 암살됐다.
특무부대는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안보를 빙자해서 정권유지의 하수인이 되었다.
정치사찰을 했고 정치인들이 고통을 당했다.
서빙고 호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보안사의 분실, 이곳에서 독재의 망령이 판을 쳤다.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라는 연재소설을 쓰던 한수산은 소설 속에 대통령을 야유하는듯한 비유가 있다는 이유로 보안사에 잡혀가 말 못할 고문을 당했다.
박정만 시인은 한수산의 친구라는 한 가지 이유로 보안사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그 후 하루에 소주 열병을 마시는 폐인이 되어 죽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겨운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한동안 글 한 줄 쓰지 못하던 한수산은 자신을 고문했던 보안사의 사령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한국에 있고 싶지 않다며 조국을 떠났다.
1990년 10월 보안사에 근무하는 이등병 윤석양은 자신이 근무하던 보안사에 양심선언이란 폭탄을 던졌다.
바로 사찰자 명단의 폭로다.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김수환 추기경 등이며 정치, 노동, 종교계, 재야 등 각계 민간인 1300여 명의 명단과 이들의 동향을 파악해 관리한 개인 사찰카드였다.
이 땅의 정치인은 거의 모두 보안사 사찰 대상이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국방장관의 목이 잘렸다.
보안사령부의 이름도 기무사령부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기무사는 변했는가.
변했다.
노무현 정부시절 기무사령관은 대통령과 독대를 하지 못했다.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속이 상했을지 모른다.
그 막강한 권력을 써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무사 요원들은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원칙대로 살면 되었기 때문이다.
특무대, 보안사로 이어지는 기무사령부.
김창룡, 김재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기무사령관.
이제 기무사는 다시 정치사찰의 망령을 살려냈다. 정말 재주도 좋다.
그러나 칭찬받을 재주가 아니라 욕먹을 재주다.
대통령을 믿고 기무사가 정치사찰을 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기무사는 이번 사건을 해명했다.
‘쌍용차 집회에 참석할 가능성이 있어 평택집회에 갔던 것’이라며 민간인 조사도 사찰이 아니라 군과 관련된 범죄정보를 확인하던 과정’이라고 해명했다.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국민을 바보로 아는가.
국민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했다.
화가 난다.
마트에서 내의를 사는 것도 범죄정보며 식당에서 불고기와 냉면을 먹는 것도 범죄정보며 새벽에 노래방에 가는 것도 범죄정보인가.
이런 것을 확인하는 것이 기무사가 할 일인가.
해도 너무 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기무사 장교의 수첩에는 CCTV에 관련된 것도 있다.
이제 마음 편하게 세상 살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자신의 일거일동을 거울처럼 들여다본다는 생각을 해 보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속에 대형(빅 브러더)이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공포 속에서 국민은 어디서 행복은 찾는가.
기무사령관의 독대는 참여정부 5년 동안 사라졌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됐다.
정보기관장의 대통령 독대는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더구나 정권안보에 신경을 쓰는 정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승만 독재시절의 특무부대는 김창룡에 의해 정권안보의 전위대로 활약했다.
박정희 독재의 수족이었던 정보부와 보안사도 마찬가지고 전두환 독재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참여정부 시절 국민은 마음 놓고 살았다.
어느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마음 조리며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는 것 같다.
왜 이러는가.
뭐가 그렇게 무서운가.
군의 조직인 기무사가 국민을 사찰하는 시대가 다시 올 줄을 어느 누가 꿈엔들 생각했으랴.
그러나 이정희 의원이 들고 나온 생생한 증거는 공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포를 벗어나는 길은 정녕 없는가. 떨면서 살 수밖에 없단 말인가.
왜들 이러는가.
정말 이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는 게 아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