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15)-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1791~1868)

안은영 / / 기사승인 : 2010-03-07 16: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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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재임기간: 1857-1861/ 단임 / 민주당.

1856년의 대통령 선거는 아주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나라 전체가 노예제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갔고 갈등의 정국은 그 끝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권 주자들의 정책 성향이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됐다.

그리고 외국에서 막 돌아온 부캐넌은 그 성향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 오히려 득을 보게 됐다.

게다가 가장 민감했던 이슈, 캔사스·네브라스카 논쟁(새로 주로 영입되는 캔사스와 네브라스카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의회에서 벌어진 논쟁)에서도 빠져있어 각을 세우고 적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아 비교적 쉽게 경선을 치른다.

본선에서는 알지마당(Knowing-Nothing Party)의 필모어, 그리고 새로 창당한 공화당의 프레몬트와 자웅을 겨룬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필모어의 출마는 휘그당을 모체로 하고 있는 공화당의 세력 분열을 가져 오게 됐고 마침내 정권을 민주당에게 내주게 된다.

바로 미국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탄생이다.

뷰캐넌은 1791년 펜실바니아에서 아홉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호텔을 경영했던 그의 부모는 자신들이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후손이라 주장을 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어쨋든 그는 비교적 넉넉한 살림으로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으며 변호사가 돼 엘리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학창시절 일화로는 디킨슨 칼리지에서 퇴학당한 일이 있다.

부적절한 행동으로 퇴학 당한 그가 스스로를 변호해 복학했다는 내용의 이 일화는 그가 달변가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실, 그는 매우 논리적이어서 상대를 설득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졸업 후 그는 승승장구하며 성공적인 삶을 이어간다.

변호사 개업과 함께 주 하원에 진출한 그는 곧이어 스물 여덟의 나이에 연방 하원에 입성하게 됐고, 5선을 지낸 뒤에는 다시 연방 상원에 진출해 3선을 이어가다 피어스 내각의 국무장관직을 잠시 지낸 뒤 주영 미국 대사에 임명돼 미국을 떠나있게 된다.

영국에서의 시간은 대통령으로 가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대선 출마에 그리 집착하고 있지 않았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사실, 그는 이미 세 차례나 되는 도전 실패로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주변의 권유로 마지못해 출마한 경우였다.

아무튼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에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대통령으로 그리고 또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 되는 기이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는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의 임기 중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비롯한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 하는데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붕괴 책임을 그에게 묻게 된 것이다.

둘째, 그는 임기 중 대부분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고 매우 소극적이어서 거의 활동이 없었는데 이로 인해 뚜렷한 공적 또한 남기지 못했다.

셋째, 유타주의 주지사이며 몰몬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브링엄 영’을 오판해 반란진압을 위한 군대까지 파견했으나 작전은 실패하고 반란 정보 역시 허위로 드러나 망신을 당하게 된다.

넷째, 미국 내전의 불씨가 된 ‘드래드 스콧’ 재판(노예출신 ‘드래드 스콧’의 자유를 두고 공방을 벌였던 유명한 케이스로 흑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고 헌법에서도 연방정부가 각주에 노예제를 금지시킬 권력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명시함)에서 남부 노예 주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대법관들에게 영향력 행사를 하게 된다.

링컨은 훗날 이 들 두고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밖에도 그는 거의 모든 행보에 있어 매우 무능력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평가들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되는 지울 수 없는 기록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사가들의 끔찍한 평가를 받는 대통령, ‘제임스 부캐넌’.

다른 각도에서 그를 평가해 보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만약, 전편 ‘프랭크린 피어스’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했었다는 가정을 전제해 봤을 때 그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비춰진다.

사실, 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남부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 했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등 7개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을 때도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자제했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미국 내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노예제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당시 산업 구조상 파산선고나 다름 없었던 노예제 폐지를 남부인들은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들의 발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벼랑 끝으로 자신들을 몰고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단위의 노동력을 절대적으로 필요 했던 남부였지만 남부 역시 노예제의 사악함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드레드 스콧 재판과정에서 ‘칼훈’은 북부 도시빈민들의 참혹한 생활을 거론하며 그들을 방치하고 있는 북부지식인들을 비난했다.

북부 대도시에는 실제로 많은 도시빈민들이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북부인들의 이같은 위선적인 모습은 더욱더 남부인들을 자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은 전쟁이 아니었다.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사악한 남부인들을 응징하는 모습의 남북전쟁 유산이 승자들만의 역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전쟁을 일으키고 수도 업이 많은 자국민을 살상한 링컨은 개국 이후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다.

그는 과연 미국인들의 진정한 영웅인가?

한번 시각을 달리하여 살펴볼 만 하다.

북미 대륙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거대한 나라 미국, 각기 자치권을 갖고 독립정부를 운영하는 그들은 대표를 파견해서 권리를 대변하는 연방 정부체제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하나의 독립된 국가체제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링컨은 연방 탈퇴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강력한 군사대응을 실행했다.

그럼, 미국의 헌법이 연방정부로 하여금 소속 주를 군사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물론 승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에서는 매우 합법적으로 해석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어째, 이리도 넓디 넓은 미국땅에서 독립된 주정부가 연방 탈퇴를 했다 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국토를 황폐화 시키는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지? 의문을 가져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조폭을 연상케 하는 이 모습은 결국 당시 횡횡 했던 제국주의의 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만약, 헌법에서 연방정부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그리고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자연스럽게 남부에서 노예제가 사라지게 됐다면 미국 역사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부캐넌과 링컨의 자리는 서로 바뀌어 있지 않았을까?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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